/ 에라이
페이스북에서 몇 년 전 추억이라며 과거의 글을 보여줬다. '내 추억 보기'. 몇 년 전의 나는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되는 게 편한 세상'이라고 했다. 무슨 관계인지 그 관계에서는 관객이 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면 '관계'와 '관객'이라는 비슷한 발음에 또 꽂혀서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되기로 이야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끝내기엔 지금의 나, 빈번히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된다.
보는 것 말고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관객. 그저 네 말이 맞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그래, 알았다. 배우들의 연기에 사람들이 반응하면 그 반응을 따라하는 관객.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하는 대사들을 보면서 '나중에 저렇게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상황은 내게 오지 않았다.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된다.
작년 언젠가 만난 친구는 말했다. "왜 너는 네 이야기를 안 해?" 나는 그 말에 다시금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 이후에 만난 친구에게도 딱히 내 이야기를 들려줄 게 없었고, 그래서 헤어졌다. 내 소개는 하겠지만, 내가 겪은 이야기까지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관계 속에서 내가 당신에게 더 건네야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전히 관계 속에서 관객을 하고 있네요, 나.
콘서트에서 종종 마이크를 관객에게 건네는 가수들이 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관객 중 어떤 누구는 어디에서 온 누구입니다, 하고 마이크를 돌려준다. 어떤 누구는 어디에서 온 누구입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콘서트의 가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도 한다. 혹은 '관객 참여극'은 관객이 참여해야만 극이 진행된다. 바라보기만 하는 관객만 가득하다면,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배우들의 대처로 극을 이끌어 나가겠지만, 극은 쉽사리 운영되기 어렵다. 그래도 '관객 참여극'의 관객이라면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다.
그러고 보면, 관객들은 우선 그 극이 펼쳐지는 극장에 간 사람들이다. 집에서 극장까지 본인의 발로 찾아간 사람들. 그 정도의 의지라면, 비록 마이크를 건네 받았을 때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도, 출연진과의 관계를 맺는 관객이 된다.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되는 것이 일단은 당연하다. 해서,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된다고 해도 일단은 괜찮다,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직은 관계 속에서 관객이 되는 게 편할 뿐이니까.
by. 에라이 / 5월 3주차에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