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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Jun 30. 2020

인사발령이 났다. 나는 안도했다.

그토록 싫어하던 지금 자리 그대로였다.

인사발령이 났다. 사람들은 어수선해졌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던 탓에 많은 사람들의 팀이 바뀌었다. 동기들이 있는 단톡방은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인사발령 파일을 열어보았다. 스크롤을 내렸다.


아, 다행이다.


나는 그대로였다. 팀의 변동은 없었다. 팀명이 바뀌고, 팀장이 바뀌는 어수선함 속에서 우리 팀은 평온했다. 큰 변화가 없는 덕이었다. 나 역시 그대로였고, 이대로라면 업무도 그대로 이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인사발령은 어차피 내 권한 밖이니 아무렇지 않다고, 어쩔 수 없다고 동료에게 말하던 차였다. 그 권한 밖의 일이 일어났고, 나는 변화가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뽐냈다.


지난 1년 반 동안 같은 일을 하면서 너무 지루하다고, 내가 이러기 위해서 회사에 온 건 아니지 않으냐고 불평하던 자리였다. 이제는 그 자리에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자리에 가서든, 무슨 일을 하든 잘 해낼 것이라 자신감 넘쳤던 1년 반 전의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1년 반 동안 같은 일을 반복했고, 새로움을 찾지 않았고, 그대로 고여버렸다. 그래서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한자리에 남으며 '다행이다.'를 외쳤다.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다. 지난 1년 동안은 정말 지옥이었다. 1년 반 전의 나는 첫 회사에 부임한 신입이었다. 가장 어린 직원이었고(회사에 나이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국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다) 팀에 배치받았지만 사수는 없었다. 곧장 병가를 들어간 과장의 업무를 그대로 넘겨받았다. 새로운 정책이 반영되던 때라 모든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도 못했다. 심지어 한 업무는 영상통화로 업무내용을 전달받아야 할 따름이었다(이미 나는 이때부터 언택트 업무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비록 줌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임자가 했던 업무를 모두 엎고 다시 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출근하자마자 12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야근수당도 신청하니 못하는 수습 때의 일이었다. 지금 이 회사에 오지 않았더라면 가기로 되어있던 다른 회사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회사는 기본급으로 연봉을 1500만 원은 더 줬을 텐데!(당시에 나는 왜 연봉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던 것인가)


그런 혼란 틈에서 점점 업무가 손에 익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가 보였다. 반복되는 업무였고, 굳이 내가 하지 않고 컴퓨터에게 맡겨도 되는 부분이 보였다. 컴퓨터에게 맡기면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라서 불안하다고, 사람이 하나씩 모든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엑셀에 있는 온갖 기능을 만지작거렸다. 10줄에 달하는 함수를 써보기도 하고, 구글을 찾아가며 VBA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컴퓨터가 '알아서' 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한 단계씩 컴퓨터가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1,000번을 모니터를 번갈아가며 보던 업무를 100번 정도만 고개를 움직이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러자 RPA라는 업무 자동화 프로그램을 업무에 도입하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이제 8시간을 온전히 써야 하던 업무를 4시간이면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1년 간의 고생을 마치며, 이제는 정해진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책을 읽었고, 때로는 재테크와 관련한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따로 구글 시트를 만들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적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재무적 자유'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런 참에 팀을 옮기면,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그걸 또 효율적으로 업무를 최적화시키느라 1년은 이  중요한 일을 뒤로 미뤄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직무적으로 더 발전을 못하는 고인 이 자리일지라도 그대로 남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회사는 평생 다닐 생각이 아니었고,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서 잠시 거쳐가는 이 곳에서, 업무적으로 전문성을 찾지 못할 것이라면, 시간이라도 벌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 저주했던 이 자리에 남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참으로 간사한 일이지만, 다행이었다. 어차피 몇 개월 뒤면 또 모든 사람이 불평불만을 털어놓을 다음의 인사발령이 기다리고 있는 시한부 자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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