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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5. 2020

튤립(아름다운 눈동자)

봄_4월 16일의 탄생화

한 사진사가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피사체를 찾아 세계여행을 하는 사진사였다. 네팔의 한 마을에 사는 소녀의 갈색 눈, 내전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 소년병의 검은색 눈, 러시아 숲에 사는 소작농의 금색 눈, 주근깨를 가진 드레스를 입은 영국 신부의 파란 눈, 처음 바다를 본 체코 할머니의 토파즈 색 눈. 이제 어느덧 99명의 눈동자를 사진에 담아냈다. 만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으려 노력했다. 

갈색 눈의 네팔 소녀의 아버지는 세르파로 일하면서 히말라야를 오르려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사진사는 아버지가 일을 하러 떠날 때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소녀의 수심 깊은 갈색 눈을 담았다. 검은색 눈의 아프리카 소년병은 내전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었다. 이제는 누구와 싸우는지, 그리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채 총에 묻은 흙을 닦아내는 초점 잃은 눈을 담았다. 금색 눈을 가진 러시아 소작농은 얼마 전 손자를 보았다. 무뚝뚝하지만 온 세상의 즐거움을 다 가진 듯한 그의 빛나는 금색 눈을 담았다. 파란 눈을 가진 영국 신부는 사진사가 머물렀던 숙소의 호스트였다. 신부는 결혼 전 숙소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사진사를 그녀의 결혼식에 초대한 것이었다.

사진사는 신부대기실에서 그녀의 두렵지만 행복해하는 눈동자를 담았다. 토파즈 색 눈을 가진 체코 할머니는 크로아티아 해변에서 만났다. 자식들과 함께 처음으로 체코 밖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바다를 처음 본 할머니는 소녀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진사는 할머니의 바다 빛이 담긴 눈동자를 담았다.

할머니의 사진을 찍고, 이제 마지막 사진 한 장만 찍으면 된다는 안도감을 느낀 사진사는 그만 바다에서 실수로 자신의 지갑과 여분 필름을 잃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형에게 연락하여 귀국 비행기 티켓을 끊은 사진사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의 여행이 지쳤는지 기내식도 먹지 않고 내리 잠만 자며 공항에 도착하였다. 게이트를 지나자 저 멀리 사진사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보였다. 그곳에는 형과 형수 그리고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2년 동안 외국에 있던 자식의 모습을 보자 어머니의 눈에는 호수가 고였다. 세상 그 어떤 눈동자보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50년간 자식들을 위해 혼자 일하면서 밤낮없이 일하다 터져버린 실핏줄들이 그어져 있는 고동색 눈동자.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며 외국에 나간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피곤에 젖은 고동색 눈동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포기했던 소녀의 꿈이 삼켜져 있는 고동색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사진사는 네팔의 소녀와 아프리카 소년병과 러시아의 소작농과 영국의 신부와 체코 할머니의 눈동자를 보았다. 사진사는 목에 있던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동자를 담았다.


_제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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