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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4. 2020

무화과(풍부) - '무(無) 화가' 세상

봄_4월 5일의 탄생화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고미술 학자 렘브란트 경은 더 이상 그림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한탄했다. 남아 있는 그림도, 새롭게 그려지는 그림도 더는 빛을 볼 수 없는 세상, 렘브란트 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무(無) 화가 세상'이라 했다. 그 누구도 빈 캔버스 위에 자신이 상상하는 무엇인가를 손으로 그려내는 일을 하지 않았고, 흰 종이 위에 색색깔의 물감이 묻어 있는 모습은 역사 관련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대신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은 디지털 바로크 세상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광원에 의한 투영. 빛이 가득한 세상이었으나 그림은 없었다.

VR 고글과 무선이어폰, 음성인식 AI 비서는 사람들의 필수품이었다. 거리마다 스크린이 가득했고 그 빛 덕에 어둠은 흔적을 감췄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어디서든 디지털 바로크 세상에 접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바로크 세상을 통해서라면 거리에 나서지 않고도 사람들을 만났고, 원하는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렘브란트 경은 누군가라도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기를 바랐다.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내걸고라도 사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쓰지 않는 종이와 물감은 생산되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고,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화가를 찾는 일이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니, 그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삶을 살아갔다.


온전히 빛만 가득한 세상에서 렘브란트 경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디지털로만 점철된 바로크 시대를 참을 수 없던 렘브란트 경이 '무(無) 화과 세상'에서 빛을 피해 지하실로 내려간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다. 그는 빛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남은 생을 지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하실엔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대부터 전해져 왔다는 그림 몇 점이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모두 빛바랜 그림이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 렘브란트 경의 집은 무인 주거지로 구분되어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그곳에는 디지털 바로크 세상의 다음을 준비하는 데이터 센터가 건립될 예정이었다. 몇 명의 인부가 중장비를 이끌고 그의 집을 허물고, 땅을 파내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디지털 바로크 세상에서 사람이 직접 작업하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러다  인부 한 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지 몰랐지만 그것을 본 순간부터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작업이 진행되지 않자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처럼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이었다.


낡아서 거의 해져버린 캔버스들이 연달아 이어져 있는 거대한 판. 그 위에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인 빨간색, 아니, 정말로 피로 물들어졌으나 무언가 의도한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진흙으로 구석구석이 채워져 있기도 했다. 거기에 땅을 파내며 빛이 새어 들어오자 낡은 캔버스에 원래 그려져 있던 그림들이 어설프게 비쳤다. 그러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엔 앙상한 뼈만 남은 렘브란트 경과 그의 피로 점철된 도막 난 손가락이 나뒹굴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림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렘브란트 경이 직접 그림을 남기려고 했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곧 그림이었다. 처음으로 스크린에 투영된 형체가 아닌 종이 위에 나타난 그림에 놀라움에 빠진 사람들은 풍족해지는 감정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렘브란트 경의 지하실에 남은 그림은 빛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간 렘브란트 경의 모습을 빗대 디지털 바로크 시대엔 없는 '빛 속의 어둠'이라는 <야경>이라 이름 붙여졌다. 데이터 센터가 건립될 예정이었던 렘브란트 경의 집은 모든 디지털 기기를 벗고서야 입장해서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이 되었다. 그 덕에 사람들은 메말랐던 감정을 그 그림을 보며 풍부하게 채울 수 있었다. 


_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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