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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꽃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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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5. 2020

디기탈리스(가슴 속의 생각)

여름_6월 13일의 탄생화

옛날 어느 왕국에 외로운 천재 대장장이가 살았다. 이 대장장이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것이든지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영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심성도 얼마나 고운지 동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어주었다. 농기구가 필요한 농부에게는 곡괭이와 삽을, 병기류가 녹슬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병사에게는 훌륭한 칼과 창을, 자신을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 하는 광대에게는 아름다운 장신구를, 어린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을 만들어주었다. 그뿐이랴? 대장장이는 마을 곳곳에 신기한 조각상과 기구들을 만들어놓아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우는 청개구리 동상, 날이 어두워지면 스스로 빛을 내며 하늘을 뱅뱅 도는 부엉이 조각상, 안고 자면 불면증 환자도 숙면을 취하는 인형까지. 마을 사람들은 대장장이 덕분에 매일이 즐거웠다.

대장장이의 나이가 80을 넘어가던 해, 대장장이는 자기 인생에 길이 남을 최고의 걸작을 완성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신비한 황금 눈알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이 눈알을 자주 사용하면 자신이 불행해질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만의 비밀 금고에 숨겨버리고 필요할 때만 꺼내 쓰기로 마음먹었다.


대장장이가 황금 눈알을 사용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자신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줄 때만 가끔 사용할 뿐이었다. 황금 눈알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부끄러워서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알 수 있었고, 그제야 비로소 그 사람이 진짜 필요로 하는 말들을 해 줄 수 있었다. 대장장이는 늙은 자신이 남은 생애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국의 왕에게 대장장이의 소문이 도달했다. 어느 마을의 대장장이가 그렇게 사람 마음을 잘 알아차린다는 소문 말이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 많은 왕은 호기심이 생겨 그 즉시 대장장이를 불렀다. 왕 앞에 무릎 꿇은 대장장이는 처음 보는 위압감에 어쩔 줄 몰랐다. 왕은 대장장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읽어보라고 명령했다. 대장장이는 왕이 황금 눈알을 알게 된다면 자기는 물론이고 왕과 이 나라가 불행해질 것을 알고 있었고, 한사코 거부했다. 하지만 왕은 기어코 소문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대장장이가 자신의 명령을 계속 거부하자 왕은 끝내 그를 잔인하게 고문했다. 극심한 고통을 못 이긴 대장장이는 결국 주머니에서 황금 눈알을 꺼내 왕 앞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추는 대장장이를 보자 왕은 신비한 황금 눈알이 가지고 싶어졌다. 왕은 격양된 목소리로 대장장이에게 신비한 황금 눈알을 하나 더 만들어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이미 너무 노쇠해 만들 수 없다고 통곡했다. 끝내 황금 눈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왕은 탐욕심에 대장장이를 죽이고 그에게서 눈알을 빼앗았다.


왕이 자신의 눈 한쪽을 뽑고 황금 눈알을 넣자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 자기 눈 앞에 보이는 신하들의 속마음이 전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왕은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신하들이 속으로 왕을 욕하는 말들이 여과 없이 왕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가 보여주는 위엄 있는 모습에 다들 수그리고 존경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속으로는 다들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왕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 왕국에 왕을 싫어하고 욕하는 신하는 필요 없었다. 왕은 즉시 군사들에게 명령해 신하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왕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갑자기 날아온 칼침에 피를 흘리고 죽을 뿐이었다.


왕은 끊임없이 마음을 읽는 황금 눈알을 이용해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가차 없이 죽였다. 매일 궁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백 명이 넘었고, 그 안에는 피가 강을 이루며 흘렀다. 죽은 사람들을 묻고 장례를 치를 새도 없이 틈만 나면 새로운 시체가 쌓였다. 왕 밑에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사라져갔다.

한 달이 지나자 왕의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넓디넓은 궁 안에 혼자만 남아 너무나도 휑하고 스산했지만 왕은 흡족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궁 안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통쾌했다. 왕은 모름지기 이래야 했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존재! 존경하고 또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 그 사람이 왕이고 그 왕이 곧 자기였다.


왕은 황금 눈알의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눈알을 뺐다. 소중한 보물이 된 황금 눈알을 어루만지던 중 왕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황금 눈알이 처음 봤을 때만큼 화려하게 빛나지 않는 것이었다. 눈알 밑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무슨 말이 써져있었다. 처음 대장장이에게서 눈을 빼앗고 자기의 얼굴에 넣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제야 유심히 보게 된 황금 눈알 하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것들은 십중팔구 나를 망치기 마련이다. 남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것들만이 진정으로 귀중하다. 이 점을 뼈에 새겨 기억하지 않고 이 눈을 사용한다면 필시 저주받은 인생이 될 것이다."

 

그날 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_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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