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라이세이 Sep 24. 2020

모과(평범) - 평범한 소개팅

겨울_2월 2일의 탄생화

"안녕하세요. 태준이 고등학교 친구 박민우입니다."


진부하다. 소개팅의 시작은 언제나 진부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태준 오빠 후배 서지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만나서 인사만 4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은 소개팅 자리뿐인 것 같다. 카페에서는 특별할 게 없는 재즈 음악이 나오고 있다. 아마 한 앨범에 있는 리스트를 반복 재생한 것 같은데, 20분 먼저 나와 기다리는 동안 한 바퀴가 다 돈 거 같다. 노래마저도 진부해지기 시작한다. 


"오시는 길에 안 밀리셨어요? 저는 이쪽에서 회사 다녀서 괜찮은데, 밀리지는 않으셨나요?"

"아뇨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더라고요. 저도 이 부근에서 일하고 있어서요."

"어느 회사 다니세요? 제가 태준이한테 이야기를 못 들어서."


통성명 후에는 일하는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정해져 있는 대본 마냥 언제나 그래 왔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이름과 회사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이렇게 말을 이어나간다.


"아, 저는 회사에 다니지는 않고요. 작게 꽃집하고 있어요."

"그래요? 신기하다. 태준이 대학 후배라고 들었는데, 같은 경영학과 아니었어요? 그쪽 진로랑은 다른데."


조금은 진부함이 사라졌다. 꽃집이라. 당연히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고향에서 꽃집을 하시는데, 부모님처럼 고생하고 싶지는 않아서 일부러 전혀 다른 과로 진학했어요. 그런데 보고 자란 게 꽃이다 보니까 결국 이렇게 됐네요. 민우 씨는 회사원이신가 봐요?" 

"네, 저는 저쪽 빌딩에서 일하고 있어요. 평범하죠. 그냥 회사원. 꽃집에 비해서는."

"아 그렇구나. 저도 태준 오빠한테 아무 이야기를 못 들어서. 오빠가 모르고 만나야 더 설렐 거라고 하더라고요."


태준이 이 자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별것 아닌 것도, 쉽게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엄청 기대를 갖게 만든 다음 공개하는 걸 즐기는 녀석이다. 소개팅을 해줄 때도 절대로 상대방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다. 이제껏 나와 비슷한, 평범한 사람들을 소개해줘서 이번에도 당연히 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그녀한테도 비슷하게 했나 보다.


"그 자식 원래 그렇잖아요. 말 안 해주는 거."

"네 그런 면이 좀 있죠."


같은 회사원이면 공통된 주제라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이러면 조금 곤란해진다. 상사나 협력사 험담을 할 수도 없고, 블라인드에 올라온 회사 이야기를 하기도 뭐하다. 


"혹시… 꽃 좋아하세요?"


이 사람도 공통 관심사 찾느라 고생한 모양이다. 아마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네… 뭐, 꽃 좋아하죠. 근데 잘 알지는 못해요. 사본 것도 그냥 행사 날 학교 앞에서 팔던 꽃다발 정도?"

"아…. 그렇구나."

"꽃 좋아하세요?"


이 질문을 하고 나의 멍청함에 놀랐다. 당연히 꽃집 하는 사람이니 꽃 좋아하겠지.


"아니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멍청함에 놀라던 찰나 그녀의 대답에 놀랐다. 


"꽃집 하는데 꽃을 안 좋아하시나요? 아, 죄송해요. 너무 따지는 투로 여쭤봤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회사 다니시는 분들 모두가 회사 제품 모두를 좋아하는 거는 아니잖아요. 저도 꽃집을 한다고 해서 꽃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관심은 남들보다는 있는 편이죠."

"아, 그렇구나. 그건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도 특별히 좋아하는 꽃은 있지 않아요?"


이럴 때는 빠르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는 게 답이다. 원래 나였으면 아예 다른 주제로 넘어갔겠지만, 다른 주제가 생각이 안 나 결국 또 꽃 이야기를 꺼냈다.


"음… 제일 좋아하는 꽃은 사실 잘 못 보긴 하는데, 있긴 있어요. 모과꽃이라고."

"모과요? 차 마시는 그 모과?"

"네, 아무래도 풀꽃이 아니고 나무꽃이라 꽃집에서는 안 쓰긴 하는데, 모과꽃을 제일 좋아해요. 분홍색 꽃이 정말 이쁘거든요. 열매랑은 다르게. 꽃말도 맘에 들고…"

"모과 꽃말이 뭐예요? 장미나 안개꽃 꽃말은 아는데, 모과는 들어본 적이…"

"좀 시시할 거예요. 모과꽃 꽃말은 '평범'이에요."


하는 말마다 예상을 뛰어넘어서 놀라웠다. 이제는 진부한 재즈음악도 들리지 않고 그녀의 말에만 집중을 하게 되었다.


"모과꽃 꽃말이 '평범'이구나. 원래 꽃말들은 보통 정렬, 사랑, 질투 이렇게 쎈 것들 아닌가요?"

"네, 그렇게 강한 꽃말들이 많죠. 그런데 오히려 저는 '평범'이라고 해서 더 끌렸던 것 같아요. 모과꽃이 정말 아담하고 이쁜데, 나중에 모과 열매로 바뀌면 정말 울퉁불퉁하고 볼품없어 보이게 되거든요. 아마도 나중에 그렇게 될 걸 알고 꽃말을 평범으로 했나 봐요. 더 멋진 꽃말을 갖고 있으면 열매가 열렸을 때 실망도 크고 놀림도 더 많이 받을 텐데, 평범이라고 하니까 기대가 줄어드는 느낌? 그래서 사람들이 외면보다는 모과꽃 향기, 모과 열매 향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모과꽃이랑 모과꽃 꽃말이 좋더라고요. 겉모습이 아닌 향기에 집중하게 해주는."

"그렇게 말하니까. 평범도 괜찮네요."


그녀가 주저하면서 이야기했다.

   

"사실 태준 오빠 말고 다른 분들이 소개팅 주선해주겠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남성분들을 엄청 포장해줬는데, 태준 오빠가 민우씨 소개해줄 때는 아무 말 없었거든요. '그냥 평범해'라고만 말해주고. 그래서 나온 것도 있어요. 평범하다고 해서."

"어떠세요? 태준이 말대로 평범하지 않아요?"

"네, 아직 많이 이야기는 못해봤는데, 평범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는 그녀가 웃었다. 평범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번처럼 평범하다는 말을 듣고 뱃속이 찌릿한 적은 없었다. 나도 그녀를 보고는 웃었다.


_제곱


#모과 #평범 #꽃 #꽃말 #탄생화 #꽃한편 #꽃단편 #네이버 #오디오클립 #팟빵 #팟캐스트 #창작 #컨텐츠 #이야기 #글쓰기 #오디오북 #프로젝트 #사이드프로젝트 #탄생화 #수필 #에세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전 26화 앵초(젊은 시절과 고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