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란 게 있다. '촉'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의 촉은 꽤나 정확해서 적어도 내가 손해보는 방향으론 촉이 발동되진 않는다.
내심 기대했던 시험에 떨어지고 기분 전환 겸 새로운 활동을 하고자 했다. 그때 떠올린 것이 '성우 수업'이다. 오디오 컨텐츠를 기획/제작하는 라디오 PD가 되지 못했으니, 내 목소리를 컨텐츠화 시킬 수 있도록 훈련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인을 통해 그룹과외 방식의 수업을 하는 한 성우님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성우님은 내가 여자일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처음 전화를 받고선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러더니 본인의 수업엔 남자가 없노라고, 그래도 괜찮겠느냐 물었다. 괜찮다고 답변했다. 성우님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럴게 아니라 남자 성우를 연결해주겠다고 하였다. 뭐, 이때까진 괜찮았다.
잘 가르치는 남자 성우 선배라며, 내가 배우고자 하는 나레이션 부분에서 충분히 좋은 수업이 될 것이라며 수업료와 장소는 이러이러할 것이라 안내해주었다. 그렇게 남자 성우님의 연락처를 받았다. 이야기를 다 해두었노라고, 연락을 하면 된다고 하였다. 연락을 하였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문자를 남겼다. 전화가 왔다.
"A 후배한테 연락 받았어요. o만원에 수업 받을거라고 A 후배가 말한 것 같던데, 저는 그 가격엔 수업 못해요. 시간당 oo만원은 받아야겠어요. 그리고 ㅁㅁ동에서 수업 진행할거라 이야기 들었을텐데, 거기서 수업은 못하고요. 수업을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장소를 알아봐야죠."
다짜고짜 수업료부터 이야기한다. 그리고 장소도 없다고 했다. 쎄했다.
"성우 지망생인가요?"
"아니요, 저는 취미로 배워보려고요. 팟캐스트 같은 컨텐츠 만드는데 쓸 생각이에요. 낭독이나 나레이션 쪽으로 배우길 원하고요."
"그러면, 그냥 제가 성우라 이야기하는 방법을 잘 아니까 저한테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낭독이나 나레이션은 그쪽이 지금 배워서 써먹을 게 아니에요."
이번엔 기분 나쁘게 쎄했다. 내가 배우겠다는 분야는 잘라 먹었다. 이건 따로 커리큘럼이 있겠거니 싶어서 넘기려 했지만, 다음 문장을 듣고선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면 혹시 한 달 정도 배우면 기본적인 부분들은 배울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학생이 혼자 매일 5시간씩 연습해야죠. 저는 그냥 그걸 봐드리는거고요. 그게 아니면 그냥 술 친구가 되는거죠."
아, 이 사람은 가르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커리큘럼이랄건 없지만 초보자 한 명, 1시간쯤 대충 떼우면 쉽게 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겠거니 여긴 모양이다. 장소는 없지만 돈은 올려 받아야겠고, 1시간씩 수업을 해주지만 배울건 혼자 터득해야 하는 수업. 일단은 다시 생각하고 연락한다고 했다.
다음 날, 수업을 받겠다고 연락을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일이 또 흐지부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성우라는 직업을 가지신 분이고, 1 : 1로 수업을 듣는 것이니 뭐라도 배워갈 것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연락을 드리며 수업료는 수업 당일에 만나서 드리겠노라 하였다. 수업 자료가 있다면 미리 뽑아가겠다고 하였다. 이메일을 달라기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러 약속한 수업 전 날이 되었다.
수업자료에 대한 연락이 없기에 혹시 준비해가야 할 것은 따로 없느냐 연락하였다. 그랬더니 수업 자료는 없다고 하였다. 해야할 것은 나중에 찾겠다고 하였다. ...??? 내일 바로 수업인데???
그러더니 돈은 지금 바로 입금하라고 했다. '싫으면 취소하세요.'라는 멘트가 문자 말미에 붙었다.
아 이 사람은 '성우'일지언정, 누군가에게 '성우 선생님'이 될 사람은 아닌가 보다, 는 촉이 발동했다. 어거지로 1시간 빼서 수업이랍시고 나를 만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당장 '취소하겠습니다.'라고 답장을 했다. 취소하라는 힌트를 준 것이라 여겼다. 그랬더니 본인은 프로라고, 그렇게 취소하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선생'은 아니라고, '학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냥 '감사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로 끝맺었다.
수업을 들었다면 성우의 좋은 목소리는 들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1시간 가량 어영부영 본인은 성우이며, 그래서 이야기를 조리있게 잘하며, 그런 나에게 수업을 받는 것은 영광인 것이라 주절대다가 집에 가라고 했을 것이다. 나머지는 혼자서 하루에 5시간씩 연습하라며 읽을거리 하나 던졌을테다. 짧게 몇 번, 문자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정말 이야기를 조리있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아, 그는 어찌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단지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