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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Mar 28. 2016

모두를 담을 순 없다는 것.

내 품의 크기.

     태어나 지금까지 직접 사람의 죽음을 느껴본 적이 없다. 장례식에 가본 적도 없고, 누군가 죽을만큼 심하게 아파서 그 옆을 지켜본 적도 없다. 어쩌면 한 명쯤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모님이 나를 그 곁에 데리고 가신 적이 없어서였는지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운이 좋게도 23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그런 분위기 속을 지내본 적이 없다. 해서 누군가 내 주위의 사람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정말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여태껏 그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없으니깐. 그래서 나는 내 주위의 사람이라면 끝까지 곁에 두려고만 애쓴다. 그래서 굳이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만 하나 싶은 사람까지도 옆에 남기려고 애쓴다. 그게 문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속앓이를 한다. 이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내가 아프기만 한데 이 사람을 옆에서 잃게 되면 그게 얼마나 더 아프게 될 지 불안해서 이 사람을 곁에서 놓지를 못한다. 결국엔 혼자서 앓는 것으로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서 멀어져간 사람들도 가만 생각해보니, 있다. 나는 아마 이때도 끝까지 곁에 그 사람을 남기려고 애썼을 것이다. 전화도 해보고, 메시지도 해보면서. 그래도 멀어져간 사람들은, 글쎄, 왜 멀어진거지? 그러면 또 혼자서 멀어져간 사람들에 대한 고민으로 속앓이다. 아니면 금방 또 내 옆으로 돌아올 사람들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거나. 그래서 내 SNS의 친구 수는 그리 많으면서도 정작 진짜로 내 속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걸까.


    그런데 이제는 지워야 할 사람들은 지울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생각한다. 가끔씩 지나가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모르겠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줄 마음이 없는데 나한테 계속 마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또 허공에 떠있는 SNS 속 숫자들에 가닿으려 팔을 뻗어보지만 닿이는 것이 없을때면. 혼자서 그런 생각에 잠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용량은, 내 품의 크기는 정해져있다. 그 안에 모두를 담을 순 없다. 내 주위의 사람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담을 수 있는 양이 이제는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것은 알겠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은 덜어내보려 한다. 조금은 아프더라도 내가 먼저 누군가의 팔을 놓기도, 떠나려는 사람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기도 하련다. 그러면 이제 내 주위의 사람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겠지. 그러면서 조금은 더 성장하겠지. 큰 숫자 속에서도 덜 방황하겠지.


대학 새내기 시절, '영글거림'이라는 별명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영재+오글거림', 어쩌면 이것과 느낌이 비슷할지도.

글을 쓰기도, 글을 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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