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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잖아

"바보처럼 난 너를 못 잊어 이렇게..."

by 돌아보면

※ 이번 포스팅은 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익명)


처음엔 귀찮았다. 임자 있는 걸 뻔히 아는데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한다고, 조만간 헤어질 거라고 말한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거면 정리라고 먼저 하고 오던가 뭐야 진짜. 대놓고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 이러는 거 니 여자친구가 알아? 어쩌려고 이래?"


"아 금방 헤어질 거야. 어차피 우리 둘 마음이 더 중요한 거 아냐?"


"그게 무슨...!"


"그럼 내가 싫어?"


"..."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 망할. 좋았다, 좋았다고. 술김에 손을 잡고 스킨십을 나누긴 했지만 그러면서 보여준 의외로 따뜻한 배려가 계속 마음속에서 맴돌며 생각났다. 그렇게 되기 전 그가 보여준 행동들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었다. 얼굴은 확실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그와 만난다면 정말 하루하루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다.


그는 결국 여자친구를 정리하고 나에게 다시 왔다. 솔직히 내가 좀 예쁘다. 그래서 달라붙는 놈들도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깊은 진심은 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난 이 남자도 그들과 같을 줄 알았는데 진짜 정리하고 와서 조금은 놀랐다.


"쨘, 나 다 정리하고 왔어."


"...진짜 정리한 거야?"


"뭐 슬픈 척이라도 했어야 했나...? 이제 좀 믿겠어?"


"그렇긴 한데 난 아직 좋다고 말 안했는데?"


"알았어, 알았어.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싫거든? 너 또 술 먹고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지?"


"와... 진짜 나를 뭘로 보고! 그럼 밥만 먹자, 밥!"


그리고 그날은 정말 밥만 먹고 카페에 갔다가 헤어졌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된 것도 참 웃기고 신기하다. 우린 같은 체육관을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퇴근하고 바로 운동하러 오는 거라 끝나자마자 집으로 바로 돌아가느라 바빴다. 그래서 처음 1년간 우리가 나눈 말들은 딱 3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중에 같은 시간대에 운동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첫 술자리에서 쭈뼛쭈뼛하고 있던 나는 그가 꺼낸 저 말 때문에 웃느라 긴장이 풀렸다. 참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여자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알고 보니 나이도 동갑이고 집 방향도 같았으며, 계속 같은 시간대에 운동을 했던 우리는 주량마저 비슷해 좋은 술친구가 되었다. 둘이 마신 적도 있고 체육관 사람들과 우르르 모여 마신 적도 있다. 그렇게 평소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나 고민들을 서로 나누며 지내던 어느 날 그 사건이 터진 거다.


취기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정신은 있었고 내 손을 잡았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웃긴 건, 싫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손을 맞잡기까지 했으니까. 어쩌면 그때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여자친구를 정리하고 온 그의 계속되는 대시를 받아들여 마침내 사귀게 되었다.


확실히 남들 사귀는 것처럼 통상적인 절차가 있었던 건 아니다. 심지어 잘 사귀고 있던 남의 행복을 빼앗아 사귀게 된 거다. 말로는 안 그래도 헤어지려고 했다지만 모를 일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연애 초 나는 그에게 굉장히 방어적인 태도로 까칠하게 대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는 내가 봤던 대로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었으며 다행히 이런 나를 처음에는 잘 받아 주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내가 그저 싫다고만 해서 포기한 것도 아마 많았을 것이다. 매일 밤 전화해 주었고 길든 짧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 주로 우리의 일상에 대한 별거 없는 이야기였지만 - 나눈 후 잠이 들었다. 평소에도 연락은 잘 됐었고 먼저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고 말해주는 것도 고마웠다. 하지만 전 여자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잘해주는 것에 대해 마음으로는 고마웠지만 내 태도는 마음과는 다르게 여전히 까칠했다. 그래도 나는 그의 마음이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다.


"나 할 말 있어."


"뭔데?"


"진짜 이게 뭔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혼자서 잘 이겨내 보려고... 해결해보려고 그동안

말 못했는데... 우리 그만 만나자. 그만할래."


"...???"


"벽을 보고 사귀고 있는 느낌이야. 아마 내가 더 잘해주지 못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역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말고 술김에 그러지 말고 천천히 니 마음을 얻으려고 했었어야 했나 봐."


"아니 나는 그게 아니..."


"지친 것도 있고, 그냥... 그만하고 싶어. 미안, 잘 지내고."


말을 마친 그는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자리에 남겨두고 카페를 떠나갔다. 평소에 장난칠 때는 그렇게 잘 쫓아가서 잡았으면서 나는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별 통보하는 건 익숙했는데 통보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처음 남자한테 차였다. 나만 겪는 이별도 아니고 지금이야 무덤덤하지만,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그때는 그냥 너무 슬펐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노래를 부른 김건모가 내 앞에 있다면 괜한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이게 뭐가 아름답다고...


진짜 내가 봐도 구질구질할 정도로 전화도 여러 번 했었다. 내가 미안했다고, 마음 알면서도 잘 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줄 수 없겠냐고까지 했다. 이 내가.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그의 목소리와 전화가 끊긴 후 들리는 삐 삐 소리뿐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더 지났고 나는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 없는 연애 조언들을 받기도 했고 해 주기도 했다. 공통된 점이 있다면 '밀당'을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는 점이다. 주어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비단 운동이나 일 뿐만이 아니라고. 운동은 다시 하면 되고 일도 만회라는 걸 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이 함께하는 연애는, 사랑은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고. 그러니 조금 쑥스럽고 지는 기분이 들더라도 감정에 솔직하라고. 누군가 반론을 펼치더라도 나는 몇 번이고 똑같이 말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그 누구와 만나더라도 처음의 그날처럼 후회 없도록.




각자 저마다의 '행복론'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별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정답은 없다. 이별을 준비하는 것, 이별을 겪는 것, 이별을 버텨내는 것, 이별을 이겨내는 것 모두 각자의 사정과 멘탈, 살아온 과거에 따라 다를 테니. 다만, 이 간단하고 당연한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이별이란 게 오지 않도록 평소에 잘 할 것, 만일 오더라도 쿨한 척은 하지 말 것, 어버버 하고 가만히 있지도 말 것, 그리고 어떻게 해도 이별을 맞이해야 할 경우, 받아들일 것. 울던 소리를 치던 식음을 전폐하던 받아들일 것.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살아가며 지금의 이 아픔과 이별이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행복을 주는 사람을 또 만나게 될 테니까. 반드시.



https://youtu.be/dXJnN9uP2o4


[린 - 사랑했잖아]


나만 원한다 했던 말도 지켜준다던 약속들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버리고 있잖아

너만 바라본 많은 날들 물거품이 돼버린 오늘

또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을 너잖아


정말 좋았잖아 행복했었잖아

가슴 아픈 그런 일들도 견뎌냈던 우리잖아


제발 그러지 마라 아직 사랑하는 날

너도 알고 있잖아 매일 밤 울며 전화하는 날

낯설 만큼 차가운 니 목소릴 들어도

바보처럼 난 너를 못 잊어 이렇게


알면서도 시작한 만남 그녀에게 미안한 맘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커진 내 헛된 욕심들

많이 부담스러웠겠지 니 자릴 찾으려 했겠지

난 알고 있었어 닫혀진 너의 마음을


정말 좋았잖아 행복했었잖아

가슴 아픈 그런 일들도 견뎌냈던 우리잖아


제발 그러지 마라 아직 사랑하는 날

너도 알고 있잖아 매일 밤 울며 전화하는 날

낯설 만큼 차가운 니 목소릴 들어도

바보처럼 난 니가 행복하길 바래


다시 나에게 너라는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 텐데 니 손 꼭 잡을 텐데


니가 원했던 만큼 많이 원했던 만큼

잘해주지 못한 날 미안해 용서해 이해해줘

끝까지 이기적인 거 이것도 이해해줄래

바보 같은 날 마지막까지 이렇게 마지막까지 미안해

린.png 린(Lyn) 2집 'Can U See The Bright'(200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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