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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편,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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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효 Aug 31. 2022

낯설게 뿌리내리다

미나리 (2021)


1

 ‘아빠는 빅 가든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스티븐 연)이 무성히 자란 풀 가운데 서서 그의 딸과 아들에게 선언하듯 외친다. 특히 ‘빅 가든’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그의 유창한 발음 덕분에 이 장면은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미나리>에는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숨기려다 이내 관객들에게 들키고 마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원어민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운 편이다. 다만 한국어보다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인해 그의 언어적 정체성이 탄로 나는 것이다. 이처럼 <미나리>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발생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발생한 이러한 이질감은 <미나리>가 전하는 주제와도 분명히 닿아있다.


 <미나리>는 한국인 이민자 1세대의 미국 정착기이다. 이들의 서사는 동양인 이민자들이 겪은 설움으로, 또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했던 모든 이민자들의 고통으로 연이어 확장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를 견디며 끊임없이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을 것이다. 언어는 그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었을 테니,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잠시 마주하는 이질감은 이민자들이 항상 경험했던 당황스러운 순간의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것을 극복해나간다. 화투나 한약처럼 ‘한국적인 것’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제이슨(앨런 김)이 이를 거부한다. 이내 순자(윤여정)의 설득이 이어지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렇게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을 섞어나간다.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은 이 섞임의 과정 안에 있다. 하지만 이내 물음이 생긴다. 이 섞임의 과정 뒤에 ‘무엇이 소멸되고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은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에 특별한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은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은폐되는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모니카(한예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인 남편에게 푸념하듯 말한다. ‘일요일엔 그냥 일하는 게 낫겠어’. 두 사람의 얼굴은 스크린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제이콥의 운전하는 오른손과 백미러에 비친 그의 두 눈, 그리고 보조석에 앉은 모니카의 뒷모습이 전부이다. 연이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제이슨과 순자의 모습이 보인다. 함께 동행한 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장면은 제이슨의 시선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짧은 장면의 시선과 영화 전체의 시선은 일치한다. <미나리>는 제이슨이 바라본 그의 가족사(史)인 것이다.


 차 안의 시선은 차창 밖으로 향한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 폴(윌 패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간다. 제이콥이 차를 세우고 폴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폴은 ‘십자가’가 자신의 교회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교회에 다녀오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 안에서 푸념을 하고 있는 모니카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음이 생긴다. 미나리 가족에게 폴은 어떤 존재일까. 특히(어쩌면 감독의 눈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폴은 어떤 존재로 비칠까.


 돌아온 주일에 제이콥과 모니카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앤과 제이슨이 덩그러니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의 설교가 이어진다. 그의 뒤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 앤마저 나가고 제이슨은 지루한 표정으로 혼자 남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폴이 자신의 교회인 십자가를 지고 마을을 지나는 장면이다. 파란색 하늘과 초록색 언덕이 정확히 1:1로 화면을 가르는 이 전경 샷은 유난히 수평적인 구도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버스 차창 너머로 폴을 발견한 제이슨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제이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버스 안의 아이들이 폴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정체성은 한마디로 기독교인(Christian)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매번 ‘예수의 이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폴(Paul)의 이름이 성경 속 인물인 바오로(Paul)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행을 재현하는 그의 모습은 유럽의 끝까지 건너가며 선교에 헌신한 바오로 사도의 삶과 닮았다.


 미국은 기독교(Protestant)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또한 미국은 다민족이 공생하는 다양성 국가이기도 하다. 아칸소 교회는 마을 주류의 공간이며, 동시에 이주민들을 수용하는 공존의 장이다. 모니카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 듯하다. 병아리 감별소에서 만난 한국인 동 료는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한인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아칸소 교회는 미나리 가족을 열렬히 환영하지만 모니카는 결국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반면 폴은 마을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아이들이 교회버스에서 폴을 조롱하는 장면은 단번에 그가 처한 마을 내 위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감독은 정작 미나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교회 아닌 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독은 그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은 주일에만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에게 끊임없이 건너가는(Cross)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 ‘십자가 아저씨’ 폴은 감독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3

 영화는 폴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그에 대한 소개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영화 안으로 투입되고선, 할 일을 마치고 홀연히 퇴장한다. 아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인 듯하다. 그는 감독의 말을 전달하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미나리>에 대한 현지의 반응을 살펴보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진실을 들춰보면 이민자들의 정착 역사에 폴과 같은 이상적인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종차별로 얼룩진 이방인 혐오의 역사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안에서 폴은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인위적인 말과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초반부의 이질감의 본질이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은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소멸시킨다. 한국에서 건너온 친정 엄마 ‘순자’는 ‘한국적인 것’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내 중풍과 같은 병에 걸려 정신이 쇠약해진다. 순 자는 천장에서 이상한 것을 본다. 뇌졸중 환자에게 발견되는 흔한 망 증상이다. 모니카는 이를 보고 다름 아닌 폴에게 퇴마 의식(Exorcism)을 부탁한다. 이 괴이한 의식은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최종 임무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미나리>를 통해 줄곧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선 것에 몸을 섞어라.’ 이를 위해 감독은 제이슨의 ‘미국인’ 친구 손에 화투장을 쥐어주고, ‘한인’들을 위해 재배한 제이콥의 채소들을 불태운다. 또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나리 가족에게 친절 하지만, 한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설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폴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민자들의 현실 속에 집집마다 헌신적으로 그들을 조력하는 폴과 같은 비주류 백인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폴’의 존재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또한 이방인들이 낯선 땅에 섞이며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수모를 고작 ‘한인들 사이의 따돌림’ 정도로 축소시킨다. 감독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허구적인 존재 ‘폴’을 창조하였을까. 그리고 감독이 설치한 이 영화적 장치는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배제시키는가. 어쩌면 뇌졸중에 걸린 순자가 천장에서 봤던 ‘헛것’은 감독이 창조한 허상 ‘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나리가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결국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의 종착역은 ‘미국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꿈은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에서 현실이 되었다. 영화의 밖에서 영화의 이데아(Idea)가 실현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 미국 내 동양인 혐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난히도 미국 땅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은 영화.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은 진정 보편적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시기상 ‘그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던 환상은 아니었을까. /글 임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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