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04
인생을 꽃이 피고 지는 과정에 빗대어 말한다면, 그때 나라는 봉오리는 피지도 못하고 떨어짐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부모님의 이혼에 이어 사기를 당해 망해버린 집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했고, 그건 사춘기 시절을 지나 이십 대 초반까지 쭉 이어졌다. 곧 군대에 가야 하는 나이라 취직할 상황도 되지 않던 마당에, 지내던 옥탑방은 주인집 아들이 사용한다며 나가달라고까지 했다. 그렇게 볕이 쨍쨍한 여름에 당장 우리는 묵을 곳마저 잃었다. 이십 대 초반의 아들과 오십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 우리는 물 없이 말라가는 줄기 같았다.
그런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가 가게를 하던 시절에 잘 알고 지냈던 덕천이 삼촌. 성도 몰랐다. 그냥 덕천이 삼촌. 집을 구할 때까지 방 하나를 내줄 테니 와서 묵으라고 했고, 그 호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골목길 낡은 상가 2층에 있는 다세대 연립주택, 그 방엔 달랑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침대 위에서, 나는 침대 아래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마운 것도 잠시, 그 집 안에서의 시간은 곧 끔찍하게 다가왔다. 덕천이 삼촌은 동거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둘은 밤만 되면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일쑤였다. 비록 그 피해가 우리가 있는 방문을 넘지는 않았지만, 직접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다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더위와 듣기 싫은 소리가 숨통을 조여왔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이상하게도 자꾸만 가위에 눌리기 일쑤였다.
그해 여름은 참 길기도 했다. 끔찍이도 더운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그 집 안에 혼자 있다가 문득 예전에 쓰다만 글 생각이 났다. 바닥에 책상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를 켰고, 녀석은 오래간만에 게임 아닌 할 일이 생겨서 좋은지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목도 비어있었던 글. 시도 아닌, 소설도 아닌 애매한 글이었다. 그 글엔 거창한 사건이 없었고, 예전에 들른 꽃가게에서 얻어온 어떤 이미지만 있었다. 꽃을 의인화한 붉은 머리의 소녀. 그 소녀를 데리고 길을 걷는 남자. 그가 회고하는 이야기. 붉은 것을 좋아했던 옛 연인, 그러나 익숙한 것에 쉽게 질려버렸던 사람. 이별. 돌아서는 그의 발밑에 떨어지는 눈물. 그녀가 좋아했던 붉은색의. 둘은 먼 훗날 우연히 만나고 남자는 일방적으로 기다림을 약속한다. 어둡고 붉은 하늘 아래서.
글은 회고에서 멈춰져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 결국 비극이 되는 이야기로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비극이란, 커다란 사건 없이 일상처럼 찾아오는 것이었으니까. 소망이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저무는 하늘처럼 조용히 절망은 찾아온다.
단숨에 끝까지 써 내려갔다. 결국 두 주인공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차가운 밤을 맞이하고, 식어버린 소녀의 몸은 깨지는 것처럼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다. 소녀는 남자가 전하고 싶었던 가장 아름다운 붉음. 글의 제목은 ‘낙화(落花)’
내 걸로는 인터넷이 안 돼서, 파일을 USB로 카피한 뒤 아무도 없는 덕천이 삼촌의 안방에서 소설을 올렸다. 당시 활동하던 사이트는 주기적으로 추천 단편을 뽑아서 게재하고 있었다. 딱히 상품도, 상금도 없지만 글을 올릴 때마다 도전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하지만 많이 써봤던 전형적인 스타일의 소설이 아니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달의 추천 단편이 추려졌다. 역시나 ‘낙화’는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지만, 못내 아쉬운 감은 있었다. 조금은 씁쓸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자유게시판을 보고 있는데 어떤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달에 좋은 글이 많은데 추천 단편으로 뽑히지 않아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내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 치부하고 말았지만.
그런데 다음날, 단편 게시판을 담당하는 운영자가 웬일로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자유게시판의 그 글을 읽고 단편들을 다시 한번 훑다가 내가 이걸 왜 못 봤지 하고 자신을 채근하게 만든 소설들이 있다고. 그중에 하나로 언급된 ‘낙화’는 추천 단편 게시판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덤덤했던 회색빛 마음이 온갖 선명한 색으로 덧칠해졌다. 곧장 제일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삶은 여전히 깨어지고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른 줄 알았던 봉오리가 활짝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따갑지 않은 햇살이 비추던 날이었습니다. 차고 습한 안개의 방에서 잠을 자던 저는 밖에서 들려온 어떤 낯선 발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멍하니 깨어있을 무렵 어머니는 문득 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저를 방에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거실에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으신 남자분이 서 계셨죠. 그분은 저를 보시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그 안색은 다소 초췌해 보였습니다.
저는 어머님께, 어쩐 일이에요? 하고 손님에겐 들리지 않도록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은 부드럽게 웃으시며 너는 이제 저분의 것이란다. 누구보다 아름답게 꾸며줄 테니, 저분에게 행복을 가져다 드리려무나. 라고 말하시곤, 제게 긴 꼬리의 리본이 달린 드레스를 입혀주셨습니다.
어머님의 손에 떠밀려 수줍게 그분과 인사를 나누자, 그분은 저희 어머님께 짧게 인사를 하고 저를 이끌어 집 바깥으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날이었습니다. 햇살은, 방안의 창문으로 보던 그것과는 다르게 눈부시고, 조금은 따갑기도 하지만 몸 안에 그 온기가 가득 차서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전 갑자기 변한 주위의 환경에 어리둥절해했지만, 그 남자분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분을 따라가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분은 주위에 가득 찬 바쁜 사람들과 매캐한 공기와는 이질적이었습니다.
긴 길이였습니다. 그분이 향하는 곳까지 가는 것은. 걸어가던 도중 본 펫숍은 꽤 인상 깊었었지요.
날은 슬슬 저물어 따뜻하던 바람도 조금씩 차가워지고 주홍빛에 물든 낙엽이 건조하게 밟혀갈 무렵 그분이 문득 말했습니다. 궁금하겠구나. 내가 어디로 가는 건지, 너를 왜 데려가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바라보는 저를 아는 듯, 그분은 시선을 계속 앞으로 향한 채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아했어. 붉은색을.
추억으로 남는 색 중에 붉은색만큼 아름다운 색은 없다면서 내가 붉은색을 가진 것을 선물하면 그 사람은 아이처럼 웃곤 했어. 하지만... 자유롭고, 현재의 것들이 과거로 묻혀간다고 해도 그녀는 그것을 추억으로 가지고 있는 법을 알았기에 난 두려웠어.
나마저 추억이란 상자 안에 묻히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그 생각에 두려움이 앞선 나는 서둘러 가장 아름다운 붉은 것을 선물하고자 했지. 그것만 주면 그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 선물을 주려던 날에 그 사람은 떠나버렸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어. 오히려 간만에 기쁘게 만났을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느꼈지. 그 사람이 하루 동안 내내 머금고 있던 슬픈 미소의 의미를. 난 그 선물을 뒤에 감춘 채 내밀 수가 없었단다. 그것을 주더라도, 더 이상 그녀가 웃지 않을 것을 알았으니까.
그녀 대신 웃으며 뒤돌아섰어. 걸음마다 발자국대신 눈물자욱을 남기며. 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좋아했을 거야, 그 눈물도 붉었거든. 거리를 물들이는 노을빛을 피해서 걸었지. 어릿광대 같은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가 다시는 그곳에 두고 온 서로를 만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더구나. 뜨거웠던 마음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던 어느 날, 서로 먼 여정을 하고 돌아온 후에 짧게나마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거야. 인사만을 나누고 뒤돌아서려 했지. 못다 한 천 마디의 말과, 아직 뛰고 있는 심장과, 밤하늘 깊은 곳에 숨겨뒀던 시간들을 삼키며.
그러다 못 이겨 돌아본 내 눈이 마주 본 그녀와 마주쳤을 때 내 손엔 어느새 주지 못한 선물이 들려 있었고, 난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섰어.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맞은편 손에 연락처를 쥐어주며 우리가 헤어졌던 그날에 그곳에서 기다리겠노라고 낮게 속삭이고 힘들게 등을 돌렸지.
비가 내리고, 하늘은 붉었어. 시간을 세는 며칠이 지나고 오늘, 오늘이 바로 그날이란다. 나와 함께 가 주렴. 이제 곧 그곳에 도착할 테니.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소녀야.
이야기를 다 들은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덤덤히 웃으며 말하는 그분의 옆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죠. 주위를 스치는 사람들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노을만이 길게 몸을 덮는 길에 다다라서 그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멀리 그림자 드리워진 한 곳을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버스 정류장.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아 오후의 거리 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은 곳. 이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오는 향기가 없는 곳. 전 두려움에 떨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분은 절 돌아보며 상냥하게 말해 주셨습니다.
괜찮아.
그래서 겨우 옮긴 발걸음이 거리에 닿을 때마다 찰랑- 하는 물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는 때론 높게, 때론 낮게 튀기며 귀를 간지럽혔죠. 덕분에 제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지고, 그분은 신이 난 듯 웃으며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제 손을 잡고 긴 길을 뛰었습니다. 튕겨 오르는 물소리에 뒤섞인 우리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며 노래했고, 그 시간이 영원이 될 것 같이 기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그 정류장에 도착해 가쁜 숨을 고르고 웃으며 수다도 떨었습니다. 버스는 언제쯤 도착할까- 하고. 그러다 그분이 신이 난 듯 말했습니다.
"항상 조금씩 늦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곳에서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왔었어. 비나 눈이 오는 날에, 혹은 개이거나 구름이 잔뜩 낀 날도. 무리한 약속에 짜증 섞인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릴 때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가벼운 농담부터 건넸고, 가끔 저 멀리서 내린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일 때면 난 기다리지 못하고 있는 힘껏 달렸었지."
한적하고 긴 거리는 사람이 드믈었어. 오늘처럼 말이야. 하지만, 내가 기다릴 때면 언제나...
저는 그 이야기에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분의 눈동자에서 그 모든 행복한 과거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행복에 젖는 그분의 이야기로 시간은 흘러갔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 거리에 흐르는 것은 시간 뿐.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해는 이제 서쪽 하늘로 잔뜩 기울어져 사라지려 하고 있었고, 벤치에 앉아있던 저는 제법 쌀쌀해진 공기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쭈욱 서서 거리의 끝을 바라보고 있던 그분은 외투를 벗어 제게 덮어주시고는 다시 거리의 끝만 바라보셨습니다. 시선은 고정되어, 말없이 굳은 채.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무어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저분의 시간은 또 멈출 테니까요. 이제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지나다니는 차들도 점점 줄어가고 있을 뿐...
하나 둘 지상의 빛을 하늘에 뜬 별들이 가져가는 시간에 그분은 제 옆에 나란히 앉아 땅을 내려보며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는 올까.
끝머리만 들린 그 작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든 무엇이든 기다리면 절대로 올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은 말라붙고 몸은 추위에 얼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힘겹게 내뱉는 숨소리만 돌려드린 채, 순간 찾아온 현기증에 그분 어깨에 기대며 쓰러지자 그분은 크게 놀라며 절 부둥켜안으셨습니다. 괜찮냐고 걱정스레 묻는 그분에게 저는 애써 웃어드렸지만, 곧 제게 마지막이 찾아오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고개를 힘없이 숙이셨습니다, 떨고 있는 제 몸을 꽉 안고. 애써 눈뜨고 있는 창백한 제 이마에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지고, 그분은 자장가를 읊듯 속삭이셨습니다.
절망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는 나를 따라주었어. 처음부터 식어갈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는 이 거리에서 나와 함께 기다려 주었어. 이젠 내가 너의 은혜에 보답할 차례구나.
자, 가거라.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붉음이여.
그분은 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셨습니다. 얼어붙은 제 몸은 산산이 부서져 거리에 흩뿌려졌지만 그것이 진정 저를 버리는 것이 아님을 저희를 지켜본 긴 하루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저물어 어두웠던 거리에 어렴풋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의 즐거운 대화소리. 흐릿하게 보였지만, 분명히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달빛 아래 걷고 있는 그들은 붉게 빛나는 꽃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이곳엔 아직 아무도 오지 않는데, 그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