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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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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 May 12. 2024

하얀 안개

가까이 보이지만 닿지 않는

 "하얀 안개 속을 걸어본 적 있어요?"

 

 그녀는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저런 질문을 건넸다. 어색함이 지나쳐 불편함이 되어가려는 단둘만의 자리에서. 흡사 저 질문을 받은 그 순간의 심정은, 역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이비 신자들을 맞닥뜨린 기분이었지만 그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 말에 흐르는 미묘한 뉘앙스는 그게 질문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자 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모르는 척 대답했다.

  

 "안개는 당연히 하얗지 않아?"

 

 내 대답에 그녀는 예상보다 더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두컴컴한 카페 조명 아래, 생기 있게 반짝거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날 지그시 째려보다가 말을 툭 내뱉었다.

 

 "뭘 모르시네. 그런 게 아니라구요. 제가 말하는 건 아주아주 하얗고 짙은 안개를 말하는 거예요."

 

 "아주아주 하얗고 짙은?"

 

 "그래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너무 짙어서 손에 잡힐 정도인 그런 안개라구요."


 그런 안개를 본 적이 있던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

 

 문득 어떤 느낌에 난 생각하다 말고 움찔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본 적 있어요?"


 "아니, 커피 찾아가라고 진동 왔어."


 나는 적당한 웃음으로 그녀의 진지함을 흘려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말이 그저 농담으로 치부되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 성숙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라고 해도 네 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에 실은 그 토라짐이 귀엽게만 보였고, 금방 풀어준 뒤 다른 화제로 대화를 자연스레 끌어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바뀌었다. 오늘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러 나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나는 먼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음, 사실 본 적 없어. 그렇게 기억에 남을만한 안개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의 눈매가 평소처럼 부드럽고 차분하게 바뀌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차분한 분위기는 사람을 깊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한번 들어봐요. 내가 걸었던 그 안개를 말해줄게요. 언젠가 오빠도 그 속을 걸었을지 몰라요."


 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평소와 같이 지나가는 안개일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그냥 기분 좋았어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차가운 공기에 젖은 겨울 이불의 느낌. 그 안에 푹 파묻힌 것처럼 그 안개 속에서 걷는 게 기분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이 안개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기분이 좋아 걸어 나간 그 길에서 길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바보 같죠?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바보 같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말았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나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이 안개가 나를 다른 어떤 곳으로 안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좀 더 걸어보기로 했어요. 어차피 진짜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에요.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아니."


 그녀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며 가볍게 웃었고, 난 조금씩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불쑥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누군지 알 것 같지만,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쫓아가려고 했죠. 혹시나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함께 가려고 했거든요. 혼자서 헤매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낫잖아요?"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뒤돌아서 가면 되는 거죠. 근데..."


 쿨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의 끝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친 난,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마 분명히 아는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을 쫓아가서... 붙잡았어?"


 나도 왠지 갈증이 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커피는 사실 점점 더 입을 마르게 할 뿐이었지만.


 "아뇨, 놓쳤어요. 어느 순간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지 뭐예요."


 "뭐야."


 난 피식 웃었고, 그녀와 함께 헤픈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멋쩍은 듯 엉뚱한 곳을 쳐다보며 웃고만 있었다. 난 다시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꿈 아냐? 예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던 첫사랑이라던가... 그게 이미지로 남아서 꿈을 꾼 거 아냐? 아무리 짙은 안개라고 해도 사람이 휙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거두고 담담하게 나를 쳐다봤다.


 "아니, 절대로 꿈은 아니에요. 느낌이 남아있는걸요. 그 속에서 숨 쉬었던 이 가슴에, 그걸 쥐어보려고 뻗었던 이 손에."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세워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밀었다. 정말로 자신의 말이 의심된다면, 한번 이 손을 잡아보라는 듯이.


 하지만 난 침묵하며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그 손은 너무나도 차가울 것 같았고, 내가 그것을 잡는 순간 안개의 한기를 넘어선 너무도 큰 무언가가 나를 뒤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곧 빙긋 웃으며 그 손을 거두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누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오늘도 안개가 꽤 짙어서 걱정했는데, 지나가다 오빠를 만나서 이런 따뜻한 곳에서 몸도 녹이고."


 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나도 한숨 돌리며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러게. 우연히 만났지만 나도 오랜만에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니까 좋다 야."


 "그쵸? 아, 그런데 오빠... 그거 알아요?"


 응? 난 대답 대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되물었고,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낯선 얼굴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아직도 하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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