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존재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과 같은 단색의 뚜렷한 감정들을 느끼기도 하지만 설레면서도 두렵거나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양립적인 감정들도 있다.
대표적인 감정이 '애증'으로 친구들끼리나 편한 사이에서 ‘애증’이라는 말을 장난처럼 우스운 감정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데 증오한다는 감정은 모순에 가까운 감정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어려운 감정이다.
우리의 하루를 살펴봐도 수많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살아간다. 사소한 일에 기뻐했다가 즐거워하고 불현듯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아파하기도 하며 타인의 작은 친절에 감사함을 느끼고 미소 짓기도 한다. 감정은 이렇듯 여러 물줄기를 통해 흐르면서 바다로 모이는 물과 닮아있다.
감정은 모순적인 감정처럼 한 가지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큰일을 겪을 때 감정은 여러 가면을 쓴 채로 나타나게 된다.
깊은 슬픔과 절망에 잠기면서도 "이건 사실이 아니야.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와 같은 현실에 대한 부정,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해?”와 같은 분노와 원망,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과 같은 죄책감과 후회 등 감정은 여러 모습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감내하기 힘든 시련일수록 사건은 하나이지만 감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수많은 삶의 사건 중, 가장 깊은 슬픔 속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상실이다. 살아가며 누구나 불가항력적으로 피할 수 없이 크고 작은 상실을 겪는다. 그 이름은 다양할지라도 본질적인 아픔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이다.
상실을 목도하게 되면 ‘상실’이라는 단어 앞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처음으로 깊이 깨닫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쉽게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 한편을 흔든다.
부모님, 배우자, 형제자매, 오래된 친구, 자식을 잃었을 때 마음속 한 조각이 뚫려 나간 듯한 허전함이 밀려온다.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추억이 되고 그 사람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뿐 아니라, 함께 울고 웃던 반려동물을 떠나보냈을 때도 우리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연인과의 이별도 다른 방식의 상실이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라는 후회 속에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간절히 꿈꾸던 목표가 좌절되거나 수년간 공들인 일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단지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방향마저 흔들리게 된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절망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깊은 혼란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또한, 갑작스러운 실직, 사업의 실패, 큰 재산의 손실처럼 삶의 기반을 잃었을 때도 마음은 텅 빈 듯 공허해진다.
이렇듯 상실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절망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상실이나 거절로 인한 감정적 고통은 신체적 통증과 똑같은 뇌 부위를 활성화한다.
쉽게 말해 실연을 당하거나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이 “가슴이 아프다"라고 느끼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뇌가 실제 통증으로 인식하는 진짜 아픔인 것이다.
만약 겪고 있는 슬픔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일상생활조차 힘겨운 느낌이 든다면 그만큼 그 상실은 ‘중요하고 소중했던 것’이라는 말로 치환된다. 우리 자신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 지금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나는 왜 이렇게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라며 자책할 필요가 없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너 언제까지 슬퍼할 거야?”라고 묻지 말자.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충분히 슬퍼하고,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과정 역시 치유의 일부임을 기억하자.
감정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그저 지금은 각자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나가는 중일 뿐이다.
마음이 괴로울 때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회피다.
커다란 슬픔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난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감정을 억누른다. 때로는 자신을 바쁘게 몰아붙이며 슬픔이 틈입할 공간조차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억눌러진 슬픔과 분노는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눌러둔 스프링처럼 언젠가 더 큰 폭발로 돌아온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물을 둑으로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지금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스스로에게 감정을 허락해야 한다. 슬프면 슬픈 대로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이 나면 하루 종일 울어도 된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눈물이 날 땐 참지 말고, 실컷 울며 내 안의 감정을 마주하자. 충분히 울고 나면 분명 이전보다는 마음이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나면, 이제 그 감정을 차분히 정리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내가 무엇에 이렇게 아픈지,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스스로 직면할 수 있다.
또한 감정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연습도 유용하다. 마치 우리가 소설을 읽듯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면서 “지금 내 안에 이런 슬픔이 있구나, 내 가슴 한편이 이렇게 아리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폭풍 한가운데 있을 때보다 차분하게 감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틱낫한 스님은 말했다.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의 구름처럼. 의식적인 호흡은 내 닻이다.”
감정을 흘러가게 둔다는 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다. 감정이 내 안에서 충분히 표출되고 흐를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깊은 절망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때 자신에게 “지금은 몹시 힘들구나” 하고 인정해 주자. 슬픔의 바다가 잔잔해질 시간을 허용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게 되면 처음엔 우리를 집어삼킬 듯 컸던 감정의 화마는 잦아들고 불꽃도 서서히 꺼지게 된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충분히 그 감정을 느끼도록 자신을 허락하자.
놀랍게도 감정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감정은 서서히 힘을 잃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솔로몬왕과 다윗왕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다윗왕은 자신이 교만에 빠지거나 절망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금 세공인에게 "승리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슬픔에 절망하지 않게 하는 반지를 만들어 오라"라고 명했다.
금 세공인은 고민 끝에 솔로몬왕을 찾아갔고, 솔로몬왕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문구를 알려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솔로몬왕도 반지에 새겨진 이 문구를 보며 자신의 모든 영광과 슬픔, 행복과 절망이 찰나의 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도 결국은 흘러 지나간다.
불교 경전에 전해오는 키사 고타미의 이야기도 있다.
어느 마을에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자식을 잃은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지고 자식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 아이의 시체를 안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품 안에서 아이의 시체가 썩어가는데도 키사 고타미는 아이의 시체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부처님은 자신이 아이를 살려줄 약을 주겠다고 말했다.
단,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찾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키사 고타미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을의 모든 집마다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어느 집 하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겪지 않은 집이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집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만 이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자신이 느끼는 슬픔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같은 슬픔을 겪은 이들이 세상 어디에나 있고, 그들도 결국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나만 왜 이럴까?”하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각자의 삶이라는 길 위에서 때로는 상실을 맛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동행자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간다.
지금 느끼는 강렬한 슬픔도, 고통도,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결국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격언처럼, 나를 둘러싼 환경과 감정의 상태는 쉬지 않고 변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언젠가 다른 상태로 바뀔 거라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당장의 괴로움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 이 감정도 흘러가고 새로운 감정들이 자리를 대신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살아가며 다시 새로 찾아오는 감정들을 환영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누군가는 간절한 꿈을 포기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예고 없이 나타난 상실을 마주하며 힘겹게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
삶에서 상실과 슬픔은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흘려보낸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슬픔이라는 바닷속에 표류하고 있으면, 바깥세상은 분명 눈에 보이지만 그 세계와 단절된 채, 나가고 싶지만, 두려운 마음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변화는 내 안에서 시작된다.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에, 변화도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가능해진다.
처음엔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힘들지만, 길고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고, 굳게 닫혔던 마음에도 새싹은 피어난다. 가슴을 저미던 기억은 차츰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변하고, 이전과는 다른, 한층 깊어진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의 파도가 가장 거세게 몰아친 뒤에는 반드시 고요한 바다가 찾아온다. 거센 비바람이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이 펼쳐지듯이 처음에는 고통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내면의 상처도,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서서히 아물고, 그 기억조차도 내가 살아온 삶의 증거로 남게 된다.
그리고 내 곁의 모든 이들도 각자의 눈물과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슬픔을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다른 이의 아픔에도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때때로 감정의 고통에 깊이 빠지는 이유는 그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다. 감정은 찰나의 파동이지만 상상력은 그것을 끝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감정은 흘러가는 강물이고, 머무르지 않는 구름이다. 스스로 감정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면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감정을 흘려보낸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모든 것은 머물지 않는다. 깊은 어둠이 덮은 밤하늘도 새벽이 오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고, 절망의 계절이 지나면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 찾아온다.
아무리 커다란 고통 또한, 반드시 끝이 있다.
이제, 붙들고 있는 감정을 놓아주고 스스로에게 희망을 선물하자.
그러면 흘러간 감정의 자리에는 새로운 감정이 피어나고, 새로운 삶의 의미가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모든 감정은 결국 지나간다.
이제 내가 꼭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펴고, 감정이 흘러가도록 허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