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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r 18. 2020

많이, 그리고 열심히 써볼 수밖에는

<문장의 조건> 존재의 이유, 글을 쓰는 이유

글을 쓰는 것은 쉬운 듯 쉽지 않습니다.


공식처럼 논술 문제를 풀어내거나 기계로 찍어내듯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것, 보고서를 맛깔나게 만드는 행위 등 기능적 작문을 ‘글 좀 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그렇다고 글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만), 보다 고차원적인 글쓰기 기술이나 요령에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대문호나 유명 작가로부터 배우려고도 하죠. 그들에게 뭔가 대단한 글쓰기 ‘비법’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민이언이 펴낸 <문장의 조건_아직 쓰여지지 않은 글>은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어록을 바탕으로, ‘글쓰기의 의미’를 좇는 에세이입니다(저는 작가 민이언의 에세이로 느꼈는데,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과 철학 대가들이 글쓰기에 어떤 인식을 지녔는지를 어록을 통해, 또 저자의 고찰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문장의 조건> 표지. 글쓰는 이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은유가 지은 <쓰기의 말들>(2016년)과 비슷한 느낌도 듭니다. 글쓰기에 대한 명인들의 어록이 도서 구성의 축을 이루는 것은 물론, ‘니체를 사랑하는 한문학도’ 민이언과 마찬가지로 은유도 니체를 문장 스승으로 꼽았습니다. 책에 담긴 어록들이나 이야기 풀어내는 두 저자의 경험 등은 다르지만, 서로 통하는 꽤 닮은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란 부제를 단 은유의 서적이 조금 더 글쓰기 자체에 초점을 맞췄고, 이 책은 글쓰기를 둘러싼 철학적 의미 탐구에 보다 신경 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유가  펴냈던 <쓰기의 말들>(2016). 수필가 은유의 삶과 생각이 잘 드러나며, '뜻을 지닌 독학자들을 향한 글쓰기 초대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문장의 조건> 이 책이 직접적으로 글쓰기 지침이나 비법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글쓰기에 왕도는 없으며, ‘많이, 그리고 열심히 써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무엇을 쓰고 있는가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저 쓸 수밖에 없습니다(사타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中 '읽을 수밖에 없어서 읽고, 쓸 수 밖에 없어서 쓴다'는 부분이 떠오릅니다). 

경험에 기반한 자신의 관점이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문체에 녹아들고, 계속해서 삶의 문체를 마주치며 성숙해 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의 조건이자 문장의 조건인 법입니다.

'살기'를 통해 '쓰기'를 위한 최적의 조건이 성립된다는 것. 참 와 닿았던 표현인데, 정말 어려운 과제입니다.

책의 내용이 제 생각과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문득 몇년 전 함께 일했던 후배 한 명이 떠오릅니다. 작문에 상당히 컴플렉스가 있었고 개선코자 하는 마음도 강했었죠. 꾸준하고 규칙적인 글쓰기를 통해 그의 문체, 그리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잘 쓰는 규칙과 공식을 원하는 그에겐 지루했던지 제대로된 실천까지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숙제검사하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제게 글이나 삶을 '교정'하는 능력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는데 말입니다.) 

최근 팀에 새로 들어온 구성원의 경우 (비록 기능적 측면이 강하지만) 매일 이 같은 작업을 통해 근력을 키워가고 있어 다행입니다.


이 책에서 오는 기쁨은 어록들을 통해 철학자와 문학 대가의 삶을 만나고, 사색 과정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의 추억을 소환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때와 다른 나를 느끼고요!

이런 책을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저자 정도의 깊이도 없고 백영옥의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과 같은 작품이 성향에도 맞는 만큼, 제가 실천에 나선다면 글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겠죠? <어느 날 영화가 내게 말을 걸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건넨 말>, <갑톡튀 만화 명언> 등 제목을 떠올리며 웃음지어 봅니다.  


민이언 작가의 글쓰기와 출판에 대한 꾸준함과 열정, "인정"이고요(제 인정이 뭔 상관 있겠습니까^^). 꽤 많은 어록들에 빠져들어 생각하게 하는, 기분 좋은 독서였습니다.


"좋은 책을 쓸 수 있는 규칙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윌리엄 서머싯 몸)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장 폴 사르트르)

"예술에 도달하려면 삶으로의 우회가 필요했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우회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알베르 카뮈)

"문체는 정신의 관상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지니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는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이다. 글쓰기가 이끌어내는 조합을 통해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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