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왜 그랬어요

사고의 전환 -

by OIM

아이고, 두야.

첫 소절부터 앓는 소리 하기 싫었지만 그럴 일이 있었다.


하늘이 높더라니.


1.

명절 잘 쉬었다. 오늘 출근했다. 예정된 일이었고 회사에 다녀왔다. 잘 풀렸다. 그런가 보다 했다. 근데 또 말을 바꿨다. 중소기업 특징인가. 무슨 액땜을 하는 걸까. 뭔 헛된 바람을 가졌길래 나한테 이러는가. 오늘 좀 의아했다. '와, 씨...' 하던 속마음이 입 밖으로 샐 뻔했다. 사연은 이렇다.


ㅇㅇ단체에서 잡지를 창간한다. 우리가 그 잡지를 만든다. ㄴㄴ사의 사보도 하나 있다. 두 가지 업무를 맡게 된다. 사보는 전담, 잡지는 분담. 그 외 업무는 부가적이다. 업무 경비는 회사에서 지원한다.(당연하다) 잡지는 95% 정도 완성돼 있다. 다음 달 창간호다. 제작을 원하는 단체(=주최 기관)가 있다. 당분간 예산 걱정 안 해도 된다. 정치인 A, B, C 등도 힘을 싣는다 등등.


면접 때 들은 이야긴 대충 이 정도. 출근과 동시에 업무를 인계받았다. 상황이 많이 달랐다.


- 잡지에 광고를 낼만한 기업/기관/단체 홍보팀 연락처를 조사, 정리하란다. 당장 내게 컨택(연락)까지 시키지는 않는다는데, 잡지 제작을 외주 받은 게 아니라 이 회사에서 창간한다는 말이었나. 말인 즉 지원단체나 관련 인사는 구실이었고 제작에 수반되는 각종 예산 확보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 "홍보팀들 연락처를 찾아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네"라니 무능인가 무책임인가.


- 사보 제작은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잡지 업무도 "거의 다 완성돼 있다"는 말과 달리 주요 콘텐츠는 다 빠져 있었다. 예를 들어 창간 축사나 인터뷰란에 들어갈 저명인사 섭외 난항. 외고가 아니라 새 콘텐츠로 채워야 하는 뉴스란 소스 미확보. 외부 전문가 필진 섭외 미비. 당장 쓸 사진 콘텐츠 없음. 취재 장비 전무. 창간 20여 일 남았다면서...


- 사실상 기간 내 창간하기 어려워진 잡지 제작의 난맥을 이 사람들은 나를 통해 풀고자 했다.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한 콘텐츠를 내가 채워야 하는 실정. 그러다 보니 첫 미팅부터 이런 소리가 나온다. "어디 줄 대는 정치인이나 국회의원, 누구 좀 어떻게 할 사람 없어?" 축사나 인터뷰에 쓸 인사 섭외를 내 인맥에 기대겠다는 말. 뉴스도 마찬가지다. 기자 시절 출입처나 보도자료를 받아오던 기관/단체 등을 통해 잡지 뉴스란을 채울 심산이었나 보다. 전문가 필진도 내게 물었다. 취재원 중 변호사나 박사, 노무사 등 누구 전문가 없냔다. 사진도 그렇다. 저작권 걸리지 않게 보도사진을 구할 수 없겠냐고. 덧붙여 잡지에 기고할 작가 리스트도 뽑아보란다. 이건 좀 심하지 않나.


- 더 심한 게 있다. 이 모든 걸 예산 없이 요구했다. 축사나 인터뷰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변호사, 노무사 등 전문가들의 지식(글)을 날로 먹으려 했다. 사진도. 뉴스 사진은 통신사에서 장당 몇 만 원에 판매한다. 구입 가능한 요소라는 거다. 이마저 예산을 들이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기고 작가들의 글과 사진도 '기부' 형식으로 받길 바랐다. 한마디로 대책 없다.


- 설상가상. 업무를 지시한 사람은 내게 "언론사 경력이 10년 이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사로 밥벌이하던 사람이 타인의 글이나 사진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기자 연차가 10년 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주니어급에 가까운 내게서 취재 데이터를 확보하려 하다니 무슨 속셈인지.


- 지방 취재 때 (사실상) 내 차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도 이날 알려줬다. 면접 때 분명 자차 이용이 어렵다는 점을 말했건만. 취재장비(노트북)는 고사하고 카메라조차 살 돈을 안 내줬다. 카메라도 면접 땐 구입할 예정이라고 하더니 출근 첫날 제시한 구입 예산은 거의 '똑딱이' 수준이었다. 안 사니 못한 금액으로 견적을 내라고 지시한 거다.


- 여기서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내가 상사에게 말했다. 이 예산으로는 사진 품질상 '폰카'와 큰 차이를 보기 힘드니 폰을 쓰는 게 어떠냐. 그러자 상사가 말했다. 그냥 찍는 것과 인쇄용으로 쓰는 건 다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요즘 신문에 쓰이는 사진도 신형 핸드폰 정도면 품질상 큰 무리가 없다. 잡지에 올 컬러 전면광고용 사진을 싣지 않는 이상 저예산 카메라를 쓰느니 휴대폰이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자 이 사람이 한 말이 가관이다. "취재하는데 휴대폰으로 찍을 거야? 모양 안 나게. 사진기자 했다는 사람이 왜 그래?" 의도했든 아니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아는 척을 하다가 들통나자 내 배경을 꼬집고 나섰다. 저예산 카메라는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에 내 이력을 갖다 붙이는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문성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 사진도, 취재원도, 전문가도, 작가도 구할 수 있다. 어떻게든 연락하고 부탁하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인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태도는 무엇?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 여담이지만 예산 아끼려고 코딩 작업까지 내게 시키려고 했다. '고름 짠다'는 말의 진위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력 없이 들어가는 곳은 그만큼의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대전제를 사실로 믿고 싶은 순간이다.


- 여담2지만 퇴사한 전임자 욕하는 건 누구에게도 득이 안 될 텐데 거 사람 참.



2.

이제 급여도 상관없다. 소모적인 일에 지쳐가는 중이다. 글 쓰고, 가까운 곳이면 어디든 가련다.



3.

어제도 4~5시간 동안 내가 보낸 업무보고 카톡을 읽지 않더니 오늘은 "그만두면 적어도 언질은 줘야 하지 않겠냐"며 카톡이 왔다. 오전 7시 30분에 문자 했건만 확인 안 하곤 나를 나무란다. 애초에 카톡 보고도 자신이 지시한 거면서. 찾아가서 인사하고 마무리하려 했으나 언제나 예의를 지키는 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뿐이란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배웠다.



4.

위와 별개로 인스타를 다시 돌린다. 페이스북처럼 정보 창구로 이용하는 중이다. 강아지 사진이나 영상 보는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게시물을 즐겨본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대여섯 권씩 구입한 책을 인스타에 올린다. 이런 게시물은 양서를 구분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는데, 도서 구입비를 매월 따로 빼두는 건지 항상 궁금하다. 도서구입비가 지원되는 회사에 충성할 준비가 돼 있는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 어쨌거나 내 일상도 조금 더 자주 공유하고 남겨야겠다며 게시물을 올리고.



KakaoTalk_Photo_2018-10-02-11-40-02.jpeg 고향에서 블랙베리Q10을 찾았으나 주물럭 거리다가 배터리 커버를 부숴버렸다.


5.

명절에 고향 내려갔다가 집중포화를 받았다. 결혼 이야기다. 친가에서 드문드문 나오던 가벼운 농이 외가 쪽에 가자 노골적으로 변했다. 외할머니는 대놓고 "언제 데려오냐"고 하셨다. 이놈 손들이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뒤늦게 외가를 방문했을 때 사촌 형이나 동생이 하루 먼저 서울로 향했다더니 이유를 짐작할 법했다. 명절 때마다 '하지 말아야 할 말' 따위로 손꼽히지만 그것을 신경 쓰거나 그 메시지가 전달되는 계층은 한정적이다. 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딱히 할머니나 삼촌들의 이야기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만 경우에 따라 무겁게 다가올 수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6.

그것보다 아버지의 말에서 오랜 '관습' 따위를 또다시 엿볼 수 있었다. 음주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어머니의 체질과 닿아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다. 잔 수가 더해지면 몸까지 달아오른다. 머리도 아프다. 섭취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때부턴 '버티는' 시간이다. 특별한 주사도 없어 그 시간이 더 괴롭다. 심지어 졸음도 쏟아진다. 그래서 내 의지가 아닌 술자리는 항상 버티고 견디는 시간이 된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자가 술도 좀 할 줄 알아야..." "사회생활하려면 술도 좀 하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이런 발언이 "나는 술을 좋아하는데 애들은 엄마를 닮아서 술을 못한다"는 말로 번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는 '좋아하는 정도'에 비해 술이 약하다. 금세 취한다. 취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많아지며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하지만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덕분에 술자리를 가지면 나는 큰 목소리로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아버지 앞에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졸음을 참아가는 형국으로 앉아있다. 즐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좀처럼 안 된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 말이다.


이런 술자리가 가족단위를 벗어나면 문제가 된다. 잔뜩 취해 기분이 격앙된 회사 상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아무도 모르게 분위기를 맞춘다. 그 와중에 이따금 터지는 '사회생활=음주', '남자는 술' 화두는 짜증을 돋운다. 예전에 잠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는 봤다. 밤늦게 잔뜩 취해 물을 사러 오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또렷하다. 그리고 이들은 몇 시간 뒤 숙취해소 음료를 사 먹으며 출근길에 나선다. 그런 일들의 반복. 힘겨워하던 모습들은 시간이 흘러도 거듭된다.


나 같은 무알콜 주자는 술을 강권받으면 불쾌지수가 급속도로 치솟는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도 꽤 기분 상한다. 없어지는 추세라지만 그런 '추세'일뿐이다. 거꾸로 생각해 운동에 젬병인 40~50대 부장, 전무에게 20~30대 직원들이 운동해야 건강하다며 아침마다 불러내 축구나 농구를 시킨다면 '맞는 말'이라며 칭찬할 텐가. 심지어 거부권도 없는 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헐떡이는 그들을 보며 젊은 직원들이 '역시 운동 최고' 따위의 말을 내뱉는다면 고운 말이 나올까. 친밀한 관계 형성에 술과 운동 중 무엇이 요긴할까. 당위를 세우려면 그럴싸한 명분이라도 필요할 텐데 음주 문화는 참으로 구차하다.


음주문화와 관련해 심리학자를 만나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왜 '사회적' 애주가들은 굳이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들을 술자리에 동반할까. 직장 동료나 새내기들, 거부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술 자체가 좋다면 혼자 또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마실 때 비용이나 분위기가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술자리 '분위기'가 좋아서라면 왜 모두가 좋아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걸까. 그러니까 왜 '술'을 매개로 비합리적인 짓을 벌이려 하는 걸까. 이것도 무슨 권위주의의 잔재나 문화로 이해해야 할까.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술을 못한다는 사람을 데리고도 술자리를 만든다. 비판을 넘어 행위의 동기가 궁금해진다. 무슨 생각일까.



7.

기자로 살다 보면 시비(是非)의 영역에 발을 담그는 일이 흔하다. 어떻게 보면 기자 일 자체가 시비를 분간하고 그 근거 찾는 일을 주 업무로 한다. 사고방식 기저에 깔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려는 습관은 아마도 그런 배경 탓이리라.


최근 친구랑 이야기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는데 이런 습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친구의 주장에 허점이 많았다. 사실 확인이나 근거가 필요한 부분들. 하지만 일상 대화에서 굳이 그런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신경 쓰이는 건 할 수 없다만 그럼에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려는 노력은 정말 필요한 부분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나는 이런 습관이 조금 불필요한 요소라고 결론 내렸다.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한 순간과 관계를 구분하는 것도 넓은 범주에서 합리적인 사고의 영역 안에 있다고도 생각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고착된 습관을 탈부착 가능한 기구처럼 없앨 수 없겠지만 작은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SNS에서 읽은 선배의 일화도 생각의 방향을 트는데 일조했다. 옥장판 따위의 효과를 설명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조목조목 반박해 어머니의 입지를 좁히는 것보다 그런 옥장판을 구입하는데 자신이 드린 용돈이 쓰일 걸 알면서도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는 게 더 나은 선택 같다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나 역시 어머니께 비슷한 이야길 드린 적이 있다. 암웨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제품의 판매 방식과 조직의 특성들을 알려드리며 관련 물품은 안 사셨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선배의 글을 보면서 그 순간이 생각났다. 이쯤 되니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야말로 비이성적 사고에 근거할지도 모르겠다.



8.

강제 긍정 신호탄으로 빌려온 책. 자신의 환경을 긍정한 김달님 작가의 <나의 두 사람>이다. 브런치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냈다 하니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겠지만 도서관에서 먼저 발견한 관계로 책을 읽는다. 글이 참 따듯하다.


KakaoTalk_Photo_2018-10-02-11-46-48.jpeg 이상한 자국은 내가 튀긴 게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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