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을 권리

글에 무료함 묻음

by OIM

휴가 둘째 날,

쉬고 있다.


앤트러사이트 연희점, 2층 입구.


오후 1시, 근처 커피숍에서 에어컨 바람 쐬고 있다. 대충 주워 입고 터벅터벅 나왔다. 매미가 대차게 울어댄다. 그런 인도를 지나 앤트러사이트에 왔다. 연희점이다.


'역시 힙스터들의 장이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에서 옛 생각을 한다. 개점 당시 인스타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인기 있던 곳이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때보다 가격도 오르고 인기도 덜하다. 그래도 감상은 여전한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꽤나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술가나 회사원을 떠올리게 한다. 자유로운 좌석 배치 탓도 있겠다. 무엇보다 내 상상력이 그러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단상은 이쯤 하고.


2층에 앉았다. '파블로 네루다' 라테를 주문하려 했지만 2층에 있는 손님에겐 '윌리엄 블레이크'만 라테로 제공하고 있단다. "원두가 떨어졌다"거나 "블렌디드만 가능하다"는 등 올 때마다 작은 불편을 선물하는 이곳을 나는 오늘도 찾았다. 모처럼.


휴가니까. 그 정도 제한은 문제가 안 된다. 연희동 수많은 커피숍 중 이곳을 찾았으니 나는 내 뜻을 관철시키련다. 그런 마음으로 주는 걸 먹는다. 사실 먹으려던 커피보다 맛은 덜하다. 조금 더 텁텁하고 밍밍한 느낌이랄까. 주관 오브 주관. 녹아가는 커피를 옆에 두고 글을 적는다.


오늘은 원래 주제 하날 정해서 쓰려고 했다. '고독사'라고 얼마 전 30대 고독사 현장이 발견돼 이슈가 됐던 그 주제다. 나는 6년 전 고독사를 주제로 심층취재를 진행한 적 있다. 워낙 자료가 없던 시기라 고생깨나 했다. 성과는 좋았는데 당시 보도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 기사 주제가 '노인' 고독사였는데 내가 찾은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었다. 그걸 얘기하려 했다. 근데 '기택'이 그러잖나.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계획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된다, 인생은. 봐라, 누가 이 많은 사람이 오늘 떼거지로 체육관에서 잡시다 계획을 했었겠냐? 그러니까 계획은 없어야 돼.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잘못될 일도 없고.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다 상관없다 이 말이지."

영화 <기생충> 중.


맞다. 암막커튼을 쳐놓고 늘어지게 자는데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오려 했다. 부동산 아주머니다. 머리에 까치집을 하곤 아주머니를 저지했다. 그 뒤로 어쩐지 잠이 깨고 말았는데, 뭔가 쓰려했던 계획도 함께 날아갔다. 상황이 시트콤만 같아서 그럴 기분이 안 났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를 쓰는 이유다. 가볍디 가볍게.


하품이 난다. 예상보다 조금 더 소란하긴 하지만 카페는 그 자체로 평온하다. 특히 이 시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일터를 벗어나야 받을 수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대로 소중하게 지금을 만끽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뭐 이런 궁상을 떨며.


어쩐지 좋다. 글에도 무료함이 묻는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야말로 횡설수설할 의무가 있지 않나. 의미 없이 인터넷을 뒤지고, 영화를 보며 사람을 구경하고 또 날이 덥다고 푸념한다. 매일이 이런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아마 돼지가 될 테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치히로의 부모처럼 내게 넘쳐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것에 매몰되고 말 거다. 자유가 주는 방종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는 제한된 환경에서 조금 더 노력하는 인간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릴 땐 조금 특이한 것 아닐까 생각하던 나 자신이, 자라면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란 걸 깨닫게 되면서 나는 내게 필요한 것과 내가 경계해야 할 것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이립'을 넘긴 나이답게 정말로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행동 양상을 보인다. 정말로 움직이지 않지.


의식의 흐름대로 일기를 적는데 콧물이 쏟아진다. 더러워. 사실상 투명한 점액에 가깝지만 어쩐지 느낌은 직감적이다. 커피잔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쓸 말도 이제 없다.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관계없이 나가서 동네를 한 바퀴 걸어야겠다. 마치 무료해 죽겠다는 심정으로 이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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