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또 감수광?

가기로 했으면 잘하고.

by OIM
신촌 세브란스 병원 앞. 2019.8.9.



가난을 예고한 지 얼마나 됐나.


7월 26일, 그러니까 보름이 흘렀다. 연이은 지시에 인내심이 부서졌다. 한여름 가을 낙엽처럼 말이다. 바들바들 입술을 떨었다. 참을성이란 거, 의외로 내겐 없나 보다. 모르는 일을 글로 쓰는 거 정말 싫었다. 어려운 글이 아니라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 연결고리를 이해할 수 없는 글 말이다. 한 마디로 납득이 안 가는데 납득이, 왜 나는 그 글을 내가 썼다는 오명을 덮어써야 하는가.


단발성 이슈가 아니다. 몇 차례 더 일이 벌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라는 지시. 이해할 수 있게끔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다. 남의 글 쓰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지 않나. 고용주의 요구에 맞는 글을 완성하기 위해 아등바등. 근데 잘 안 되데. 이를테면 기-승-전-결이 있는 글에 '기'와 '결'을 정해두고 글을 완성시키라는 뭐 그런 요군데. 주어진 '기결'론 도무지 상식적인 내용으로 귀결되지 않는 걸 난들 어쩌나.


그래서 썼다. 가난할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글을 쓰게 될 때를 기다렸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땐 거의 염원에 가까웠다. 근데 그게 통했는지 나 일단 제주 간다. 면접, 그러니까 잡인터뷰 뭐 그런 거. 김칫국이지만 정말 '가난'이 가시화됐고, 섬 생활도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묘한 기시감이 드는 밤이지만 뭐 어때.


제주와 내 인연은 2016년에 시작됐다. 당시 언론사를 그만두고 제주행을 결심했다. 면접 보러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갔고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면접관은 나가는 길을 마중해줄 정도로 매우 호의적이었다. 다만 '제주 평균'이라는 급여 벽을 넘지 못해서 당시 제주행은 좌절됐다. 연봉협상에 실패한 거다. 어지간한 아르바이트로 받을 수 있는 돈을 사측에서 제시했고 나는 조금 더 원했지만 안타깝게 결렬됐다.


지난해 또 한 번 제주행을 시도했다. 정확히 1년 전 이맘때다. 브런치에 쓴 글도 있다. 그게 2018년 8월 9일이다. 제주 간다고, 면접 간다고 그렇게 썼다. 들뜬 기분이 글에도 드러난다. 그러다 물 먹었다.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부른 뒤 쓸 데 없는 질문으로 내 시간을 허비했다. 차비 15만 원 정도가 그대로 날아갔다. 더불어 제주로 가려던 마음도 함께 날아갔다. 제주행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지난 6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 이력서를 넣은 지 3주 정도 지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올 마음이 있냐고. 사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렇잖나. 요즘 이력서를 읽으면 언제 읽었는지 뜨는데, 내 이력서를 읽고 20일 뒤에 연락한 거다. 모집 기간 마감과 관계없이 그 정도 텀이면 누가 봐도 '차선책'이다. 누군가의 대안으로 나를 뒤늦게 부른 거.


전화 인터뷰도 가관이다. "본인은 출중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선 막내부터 시작하는 거"란 말을 대뜸 꺼낸다. 내가 꺼낸 말도 아닌데? 그런 불필요한 말들의 향연 속에 '굳이...'라는 생각이 뇌 내에 뜬다. 수화기 속에서 "포기하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니 이른 시간 내 말해달라"는 말도 들린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왜 이렇게 불필요한 무례를 사람 앞에 꺼내놓는지 의문이 일었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8할은 사람에게서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이 기회도 포기하고 만다.


물론 앞선 전화를 2주 전에 받았더라면 면접관이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올래?"라고 물었어도 나는 갔을 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갔을 거란 말. 그 정도로 내가 내 의사에 반한 글(=의사와 다르거나 무관한 글이 아니라 반하는 글)을 쓸 때 받는 고통은 컸다. 그 행위가 반복해서 벌어지며 당위성까지 부과되자 심리적 그로기에 빠졌다. '제주'가 답은 아닌데도 제주를 이렇게 원하게 된 걸 보면 어지간한 충격이었나 싶고.


어쨌든 나는 생에 4번째 제주행 기회를 얻었다. 이번에도 차비로 10만 원을 쓴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성수기와 늦은 예약시기가 겹쳐 10만 원도 그나마 선방 수준이다. 이 와중에 태풍 레끼마의 영향으로 일부 비행 일정에 차질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기사는 마음속 불안을 슬그머니 끄집어내고. 제때 못 내려가도 문제고, 반대로 못 올라와도 문제다. 내일 비행 일정마저 차질이 생기면 '하늘의 뜻' 같은 걸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기 10시간 전. 의외로 긴장감은 없다. 덤덤하고 또 편안하다. 떨어져도 물러날 곳이 있어 그럴 터다. 이럴 때가 보통 합격률이 좋았던 것 같지만 합격 후 만족감은 필사적일 때가 조금 더 나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렴 흘러가는 대로 두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남은 올해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당장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맛도 있을 테니 그마저 즐기도록 하자는, 그런 여유의 범람. 과연 애증의 섬 제주는 이번에 나를 향해 웃어줄 것인가.




*항공기 좌석 지정하다가 날개 뒤쪽으론 아무도 안 앉아있길래 제일 뒤쪽에 혼자 자리 잡았다. '소음이 엄청나다', '진동이 심하다' 등 체험기가 많던데 내일 한 번 체험해보련다.


**맥북을 가져갈까 말까 고민 중이다. 면접 시간까지 약간 텀이 있어 글을 쓸까 했는데 비바람이 워낙 심하다고 하니 짐을 늘리는 게 망설여진다. 제주 바람이 어느 정도이려나.


***여름 정장이 없다. 땀범벅 정장 남이냐, 비범벅 캐주얼 남이냐. 이 시점에 고민할 주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사히 잘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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