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어서

_쓰는 글

by OIM

비가 내렸다. 신발이 젖었다. 바지 밑단도 버렸다. 축축한 우산을 갈무리해 손에 쥐었다. 덜컹대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일터로 향했다. 오후 한 시. 허기진 시간이다. 길거리엔 사람이 많지 않다.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 때를 피해 사람들은 어딘가로 숨어든 것 같다. 물웅덩이를 피해 걷던 나도 금세 식당으로 숨었다.


에어컨 바람이 분다. 덥지 않지만 눅눅하다. 서늘함은 이를 위한 위장인가 했다. 여름과 가을의 어디쯤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식당은 끼니때를 놓친 사람들로 조금 붐볐다. 바쁜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머릿속에 차오른 게으름으로 그들의 사정을 눙친다. 배는 부르니까 아무렴 어떨까.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옮긴다. 다들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다.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사람들 손에 들린 우산 따위를 피해 걷는 나를, 그들도 피해 가느라 그런 듯하다. 세상이 젖어버린 날은 평소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그렇게 생기는 여유는 가끔 틈을 만든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사정(事情). 평소라면 보고 넘길 것들이 시야에 찬다. 내 사정도 아닌데 내 사고에 들어찬다. 차고를 잘못 찾은 자동차처럼 이물감이 생긴다. 이게 다 날씨 탓이다, 이게 다 날씨 탓이다. 뇌까려봤자 소용없다. 옆으로 걷는 비를 우산이 막아주는지, 몸은 늘 젖고 나서야 답을 놓는다.


지하도를 걷다가 3인 가족을 본다. 맞은편에서 걸어온다. 5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할머니의 손을 잡은 아주머니의 손에는 캐리어가 들려있다. 그런 모양새로 3명이 나란히 걷는다. 이 가운데 할머니의 시선처리가 어딘가 어색하다. 흡사 '불편한' 사람처럼. 그게 불편해 몇 번이나 돌아본다. 내가 좀 그래서.


우리 외할아버지가 그랬다.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요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그때 문안인사를 갔던 엄마 팔에 멍이 들었다. 악화된 건강 탓인지, 악화를 막으려는 약 기운 탓인지 모를 그것에 외할아버지는 다소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희미한 기억 대신 엄마의 팔을 잡는 것을 외할아버지는 택했다. 집에 가자고.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옛말은 내게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 때문에 나는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몇 년도 더 된 기억을 비 대신 맞는다. 우산도 있고 할 일도 있는데 스며드는 그들을 나는 막지 못한다. 아마도 날씨가 원인이라며, 젖은 기분을 털고 발걸음을 뗀다.


오후 6시. 행사는 끝났는데 기억에 없다. 하루 종일 남은 것은 스쳐간 타인의 뒷모습뿐. 내 의지로 각인한 잔상이 아니기에 글이라도 남기면 휘발될까 쓴다. 비는 그쳤는데 생각이 그치지 않아, 어째서인지 쏟아내야 할 것도 같고.


야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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