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앞날이 조금 더 밝을 순 없을까
#신념 사회
변희수 전 하사가 사망했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를 향한 모욕성 발언이 온라인에 들끓었다. 저마다의 기준으로 고인을 재단했다.
혐오는 혐오를 낳았다. 이런 과정이 한동안 반복됐다. SNS는 분노를 판매하는 시장바닥 같았다.
요즘은 이런 장면에 기시감을 느낀다. 혐오에 익숙해진 탓이다. 타인의 적대감에 손쉽게 노출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혐오는 일종의 디폴트 값으로 다가온다.
혐오를 혐오하는 일은 옳은가. 명분을 얻은 분노는 정당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그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당위를 얻은 분노는 사안의 시비와 별개로 더 높은 폭력성을 띤다고 한다.
혐오의 명분이 대체로 개인의 신념화된 생각에 있다고 볼 때, 신념이란 인간성과 상반되는 개념이 아닌지 글을 쓰며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신념으로 점철된 사회는 꽤나 폭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듯하다. 마치 우리네 사회가 선명하면서도 서슬이 퍼레서 어쩐지 베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튿날이 지나고
또 야근했다. 처리해야 할 업무를 오후 3시쯤 끝냈더니 퇴근 1시간 전에 일거리를 주셨다. 의자와 책상 등을 나르고 조립하는 사무실 정리 업무다. 오후 4시쯤부터 3시간 넘게 일했다. 결국 8시가 다 돼서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야근이 반복됐다.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날 야근한 이유도 사무실 정리를 위해서였다. 그게 어딘지 이상하다며 다른 책상, 의자로 바꿨다. 그렇게 또 잔업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다.
"000 씨, 오늘 좀 늦게 가셔야겠는데? 괜찮죠?"
내가 여기 오면서 받기로 한 임금이 150만 원 정도다. 전 직장 임금의 절반 수준이다. 이런 임금을 수용한 이유는 하루 6시간 근무를 준수해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노동으로 고정 수입이 담보된다면 무엇이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낙관이 이틀째 후회의 원인이 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제는 집에 가는 길에 헛웃음이 나왔다. 채용공고를 믿은 내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봤다. 여기도 가봤고, 저기도 가봤지만 어디나 비슷했다. 정도의 차이를 감내하는 기준은 결국 임금 수준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낯선(?) 근무 환경을 택한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유니콘을 쫓아온 사냥꾼의 처지가 아니었을까.
오늘 출근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제 잔업의 여파인지 다들 천천히 나오는 모양새다. 덩그러니 사무실에 앉아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 내가 얼마 받고 일하는지 알고 잔업시키나?' 야근이나 휴일근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분에서 사실상 트리거는 당겨졌지만, 수시로 현타가 오는 것을 떨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