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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M Mar 14. 2022

관계지향성 가면

벗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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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같은 사람(INTP)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결과 자체보다 과정의 합리성에 주목하게 된다. 조직에서 '점심값으로 매월 10만 원씩 각출하자'라고 중지를 모을 때 '10만 원'이라는 액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다.


  액수를 정할 때 주변에서 한두 명씩 10만 원이어야 하는 이유를 보태는데,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가 직장 생활의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의견 교환 과정에 주도권을 잡으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예컨대 '12만 원 정도면 되겠다. 요즘 식당 물가 많이 올랐으니까.'는 좋다. '15만 원으로 하자. 점심은 좋은 음식들을 먹자.'도 괜찮다. 근데 '10만 원으로 하자. 그게 많은 돈은 아니지 않냐.'라고 하면 열이 오른다.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오르는 미열이다. 의견을 교환하는 태도의 문제일 수 있는데, 주관적인 의견을 당위로 끌고 갈 때의 거부감 같은 것이 있어 충분한 설득 없이 특정한 결론에 시비나 윤리관 따위를 대입해 밀어붙이면 입을 닫게 된다.


  대게 이런 과정에서 합리를 가장해 반박하는 의견(또는 사람)은 비윤리적이거나 비인간적인 포지션으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는 주류에 반하는 의견을 내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초기에 의견을 주도적으로 끌던 집단이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이 과정들이 퍽이나 피로해서 굳이 회의 같은 것이 필요할까 싶지만 회의는 어떤 결론에 정당성을 입히는 채색 같은 일이라 민주적 절차라는 보호색을 띠려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게 아닌가 의심해본다.


  그러니까 조직에서 회의라는 것이 조금 더 생산적이거나 나은 결과를 위한다는 본디의 목적으로 애용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얘기를 근래의 경험으로 풀어놓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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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주하는 동네 특성상 출퇴근길에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게 된다. 어느 것 하나 붐비지 않는 것이 없다.


  지난주에는 예고했던 대로 지방 출장을 다녀왔다. KTX를 이용했으며 오가는 길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


  부쩍이나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난 요즘 이런 환경 탓에 주의를 기울인다. 지난주에도 일정을 마친 뒤 자가검진키트로 검사를 했으며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에 다시 검진키트를 이용한다. 여태껏 7번가량(신속항원 포함) 코를 쑤신 경험이 있다.


  오늘 아침에도 자가검진 키트를 이용하면서 의외로 안 걸리는 사람은 걸리지 않는 게(동어 반복 같지만) 아닐까 생각해봤다. 내가 집안 생활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확진자와 밥을 먹었을 때도 음성 판정이 나온 까닭이다.


  내게 코로나란 화두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체감되는 위험성도 높지 않다. 그래서 가볍게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지인과 코로나의 전파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지인의 지인의 지인, 엄밀히 말해 나와 무관한 사람의 사례이지만, 그 지인의 9살 난 아이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뒤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코로나를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과 함께다.


  마음이 미끄러졌다. 너무 나이브했다.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깨달아 버렸다. 응어리가 졌다.


  요 3일 사이 확진자가 100만 명이나 나왔다. 어지간한 광역시 한 곳의 인구가 전부 확진된 규모다. 위중증자는 1,000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사망자 수는 720명에 달한다. 너스레 떨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일을 겪은 뒤 어딘지 겸연쩍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실수를 자각한 뒤 방향키를 놓친 조타수처럼 허둥거렸다. 보이지 않았겠지만 조금 그랬다.


  해프닝의 여파는 글에도 묻었다. 글이 어딘지 축축하다. 기분과 날씨의 콜라보가 분명하다. 점심시간엔 주변을 걸었는데 썩 효과는 없었다. 이 글은 응어리진 마음을 풀려는 두 번째 시도다. 갑작스러운 브런치는 대게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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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말고' 식의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이렇게 힘든지.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발언에 대해 '내가? (그랬다고?)' 같은 반응을 보여서 고구마를 입에 물고 물구나무를 서는 기분마저 든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신뢰하는 경우가 많아서 설령 자신의 발언이 잘못된 사실관계에 비롯됐다 해도 그것을 기억하지 ''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상황에 대한 책임을 스무스하게 피해 간다. 이럴  대화 상대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여 대화  갈등을 피해  것인지 시비를 가려 대화를 바른 방향으로 끌고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데, 전자를 택하면 드래곤볼처럼 사리를 하나둘 수집하게 되고 후자를 택하면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이당한다. 그래서 나는 단단한 자존감을 적당한 자신감으로 포장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인연에 있어 죽을 때까지 자만추를 추구하는  같은 부류는 인간관계에서 헛발질을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일단 나부터 자존감이 여물었으면 좋겠고 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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