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명동

by OIM

_춥다. 오랜만에 찾은 서울의 공기가 알싸하다. 폐를 채우는 찬 기운에 '이게 서울인가' 싶다. 밤 11시 언저리에 눈이 쏟아진다. 명동 밤 거리가 하얗게 고요하다. 이국을 찾은 사람들만이 신명나게 입을 연다. 알 수 없는 언어가 눈 사이로 낙하한다. 마감을 앞둔 포장마차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희뿌연 연기와 새하얀 눈 뒤로 하루가 진다. 불 꺼진 네온사인 앞으로 발도장을 만든다. 내리는 눈의 족적이 썩 아름답다. 길은 조용하고 밤은 고요하다. 이 적막을 씻어내릴 뜨거운 물에 어묵처럼 몸을 담그고 싶다.




1.

연말정산에 골머리를 앓는다. 2년 전부터 이직 아닌 이직을 해왔더니 세금계산이 어렵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적 없는 나는 할 때마다 일이다. 이번에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서류를 내려고 하니 사이트 대기자만 17,100여 명이다. 오늘이 마감이라 들었는데 제때 할 수 있을까. 뭔가 심기가 편치 않다.


2.

당직이다. 기자회견 하나를 처리하고 인터뷰만 남았다. 비교적 널널한 일정 속에 할 일을 찾는다. 연말정산은 대기 시간 탓에 어쩔 수 없이 패스. 이 글을 쓰는 동안 16,500명 대로 떨어졌다. 글을 쓸까 했지만 그마저 눈치를 본다. 가장자리에 앉은데다 막내인 나는 쉽게 글을 쓸 수 없다. 펜기자를 할 때는 글 쓰는 게 일상이었다. 카메라를 잡은 요즘은 쓸 일이 드물다. 그래도 기사를 보는 대신 활자를 놀린다.


3.

몇가지 일을 처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분다. 사무실에 한기가 돈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찬 공기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기분 탓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그런 기분을 준다. 그래서 이 글이 낯설지 않다. 창문을 닫는다. 순간, 고요가 귓전 때린다. 안도. 죽은 냉기의 몸에 이불을 덮는다. 이 밤 온기롭다.


4.

아침에 선배에게 라떼를 한 잔 얻어먹었다. 점심 먹고 라떼를 한 잔 사먹었다. 저녁 취재 후 선배가 사준 라떼를 또 한 잔 먹었다. 라떼만 무려 세 잔 마셨다. 저녁 먹고 습관적으로 커피를 찾았다가 이내 우유로 바꾼다. 그나마도 커피와 딸기 우유. 커피우유를 마셨지만 왠지 커피를 마신 것 마냥 속이 쓰리다. 딸기우유 마실 걸. 작은 후회 중이다


5.

아는 형이 오늘 단독을 쳤다. 이직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뜨거운 걸 캤다. 의원실을 끼고 했다지만 좋은 출발이다. 이 형의 기사를 보면서 조금 전까지 곱씹었던 생각을 게어올린다. '역시 펜기자를 해야...' 같은 평범한 생각이다. 오후에 취재 갔다가 제보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제보하려는 사람을 현장에서 만났다. 사건의 기사화 가능 여부와 제보의 진위는 둘째 치더라도 내가 그것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떠올랐다. 능력보단 역할 고민이랄까.


6.

서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고법에서 취재를 마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는데 누군가 나를 잡았다. 그는 억울하다며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했다. 빠듯한 일정에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취재는 펜기자의 몫이라고 생각해 회사로 제보하라고 이야기를 돌렸다. 내가 취재를 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선 상태에서 월권인지도 모를 일을 강행하기엔 여러모로 리스크가 컸다. 그때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데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자 주도적인 취재에 갈증이 생긴다.


7.

당직을 마치고 대학원 신년회에 간다고 잠시 글을 줄인다. 나머지 글은 야밤에 이어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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