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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휴가 끝났다.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은 고요하다.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아쉬움이 적막을 타고 흐른다. 온 동네가 조용한 가운데 아쉬움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에 속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해본다. 지난 명절은 연휴와 일상의 경계가 없었다. 그 느낌이 현재와 교차되며 생각이 많아진다.
연휴, 명절처럼 모두가 함께 하는 순간이 오면 궁색해지는 집단이 있다. 백수다. 특히나 명절에는 소속이 불분명한 것만큼 어색한 게 없다. 뉴스에 때마다 보도되는 '명절에 듣기 싫은 소리'에는 안부를 가장해 백수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들이 포함돼 있다. 어쩔 수 없이 내려가 불편한 자리를 함께 하는 백수에게 그것은 곤란함 이상의 성격을 내포한다.
직장인들에게 명절은 '쉬는 날'이라는 메리트라도 있다. 그것을 불편한 질문과 맞바꾼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백수에겐 매일이 쉬는 날이라 얻을 것은 없으면서 상처만 안고 오는 명절이 돼 버린다. 오고 가는 차비는 또 어떡할 것이며 인사치레로라도 들고 갈 것 없는 빈손은 헛헛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좋아할 수 없는 명절을 어쩔 텐가.
지난해 추석 때인가.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직장을 구하고 그만두는 과정에 명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명절마다 백수일 때가 종종 생겼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면 통장 잔고를 걱정하게 되는데, 명절은 목돈이 나가는 '이벤트 날'처럼 다가온다. 직장을 다니는 척이라도 하게 되면 더 큰돈이 빠져나갈뿐더러 거짓말도 덤으로 얻어서 고향으로 간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적지만 외할머니께도 드렸다. 조카들에게도 세뱃돈을 안겼다. '해야 할 도리' 같은 걸 한 셈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빠뜨리면 부모님은 '혹시...' 하며 내 상황을 걱정하시는데, 그런 일 없이 방어를 충분히 해냈다.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은 자식이 탈 없이 살고 있다는 도장을 반년마다 부모님께 찍어드리고 오는 기념일 같단 생각이 든다.
-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울산까지 7시간 20분 걸렸다. 휴게소를 두 번 들렀고 버스 안에서 잠을 네 번 깬 것 같다. 우등 버스를 구하지 못한 나는 마흔 명이 넘는 버스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 의자를 젖히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더불어 앞자리에 앉은 사람도 의자를 젖히려고 하다가 내 무릎에 몇 번이나 가로막혀 꼿꼿이 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시도를 "아!"라는 소리로 매번 방어했다. 의자에 무릎이 부딪힐 때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신호를 알아듣는 그가 조금은 대견했다.
- 어디 휴게소였더라. 자다 깨다 해서 어딘지 기억도 안 난다. 밥을 못 먹고 버스에 오른 바람에 휴게소마다 내려 먹거리를 사 먹었다. 통감자는 여전히 기가 막혔고 핫바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조지아 커피는 먹으려고 샀다가 의외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아침햇살을 샀으면 잘 먹었을 텐데 하고 후회해봤다. 먹을 걸 사려고 할 때 두 가지 정도를 놓고 고민하면 대체로 이 모양이다.
기사 아저씨는 휴게소에서 15분간 쉰다고 알려줬다. 비몽사몽으로 내리면서도 시간은 제대로 들었다. 휴게소를 알차게 활용하려면 시간 엄수는 필수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핫바 같은 간식을 사 먹는다. 편의점에 들러 음료나 키스틱 같은 걸 챙긴다. 이 정도가 기본이다. 시간이 남으면 다른 것도 할 수 있지만 대체로 '기본'을 해치우면 10분이 조금 넘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배가 고팠던 나는 기본을 해치우고도 임실 치즈를 먹고 싶었다. 누군가 치즈의 종류를 고르는 걸 보고 뒤에 서서 입맛을 다셨다. 이미 핫바를 먹은 뒤지만 치즈에 군침이 돌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며 먹을까 말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발길을 돌렸다. 버스에 앉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살짝 남아 먹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임실치즈는 무슨 맛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출발을 기다리는데 한 명이 안 왔다. 기사 아저씨는 내부를 둘러보며 "15분이라고 얘기했는데..."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누군가 물어봤는지 "한 명이 안 왔어, 한 명이"라고도 말했다. 그 '한 명'은 출발시간을 10분 넘기고서야 버스에 도착했다. 한 손엔 어묵 국물을 들고 다른 손엔 음식 통을 든 채였다. 그 자세 탓이었는지 "죄송하다"라고 말하는데 전혀 죄송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 임실 치즈는.
- 오랜만에 만난 누나랑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낮엔 아이들 본다고 정신도 없었고 가족들이랑 있다 보니 말할 시간도 없어서 새벽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략 4시 반쯤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옛날이야기부터 별 말이 다 튀어나왔다. 예전부터 느껴오던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됐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역시 이런 캐릭터구나 하는 느낌이랄까. "너랑 난 안 친하니까"라거나 "네가 방어적인 것 같다"라는 말을 면전에 대고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랄까.
자매는 상당히 살가운 반면 형제는 대체로 데면데면하며, 남매가 살가운 경우는 누나가 동생에게 돈을 많이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개중 '남동생'은 모두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포지션이라는 말도 했다. 대화의 성격은 우스갯소리였지만 앞서 밝힌 것처럼 이 누나의 발언은 종종 이상하리만치 정이 없다. 살가운 남매의 경우도 '관계가 친하니 누나가 돈을 쓰는 것이겠지'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뱉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럴지도"라는 말 정도가 누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이란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탓이다.
이런 캐릭터를 상대로 살가운 척을 하거나 장난을 했다가 핀트가 나가면 괜한 생채기가 생긴다. 누나는 "네가 결혼하면 우리가 볼 일이 생기겠냐"며 "일 년에 한 번은 볼 수 있는 일을 만들자"는데 "데면데면하다고 안 보면 아예 안 보게 된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조금 인간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티를 내면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게 되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늘 공부를 잘했으며 한 번 삐지면 일주일 넘게 엄마와도 말하지 않았고, 밤늦게 과외하러 온 사촌오빠에게 졸린다고 짜증을 부려 두 번 하고 그만둔 사람이다.
주관이 강하지만 자신이 제대로 인식하지 않(못하)고 있는 듯하며 경험의 폭이 넓지 않다. 가령 학업 우수/인문계/미대 정도를 특징으로 한 사람들이 주변의 대다수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직간접적 경험을 벗어나면 이해 폭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때문에 아예 다른 입장에 대해 가끔 "이해할 수 없다"거나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설득이 쉽지 않다. 누나가 대학에 간 뒤 우리는 특별히 같은 시간을 보낼 기회가 적었는데 정말 의외의 포인트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 한 대립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전히 '막내'라거나 '게으름' 또는 '숫기 없음' 정도로 동생을 인식하는 듯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수년째 부인한다고 갱신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아 이제는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이 때문에 '너는 막내 티가 나잖아' '너 게으르니까 괜찮을까' '숫기 없는데 할 수 있나?'정도의 대화 흐름을 가끔 마주하지만 좋을 대로 생각하란 식이다. 그런 면에서 가족이란 친구와 또 다른 특징을 갖는데, 그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생각해버리기엔 복잡다단한 것 같다.
- 초콜릿 풍년이다. 밸런타인데이 다음에 설날이 이어져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여자 친구에게 받은 생초콜릿은 한 번에 다 먹기에 무리가 있었다. 초콜릿이란 걸 과자처럼 마구 집어먹긴 힘들었다. 직장에서 받은 초콜릿도 남았다. 페레로로쉐는 하나 먹고 남겼고, 네모난 상자에 들은 초콜릿은 뜯지도 않았다. 그나마 로아커 웨하스는 거의 다 먹었는데 아직도 남은 초콜릿을 보니 의외로 많구나 싶다. 그래도 내 먹성을 고려할 때 머지않아 바닥을 보일 걸 알 수 있지만 지금은 마냥 마음이 달다.
- 십수 년째 이어지는 인연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룸메이트였던 체대생 친구와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등이다. 둘은 모두 울산에 살고 있는데 명절 때마다 연락하며 만나는 친구다. 한 명은 가게를 본다고 외출이 힘들고 한 명은 결혼을 해서 이번에는 둘 모두 만나기 힘들 것 같았지만 어쩐지 둘 다 얼굴을 보게 됐다. 둘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어릴 때와 다르게 우리가 어느새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게 됐단 점에서 시간이 많이 흘렀단 걸 알 수 있었다. 예전만큼 만나기는 쉽지 않아졌지만 만날 때마다 반가운 친구가 한둘 있는데 얘네 덕분에 고향이 외롭지만은 않다.
- 친구 만나서 잠시 피시방에 갔는데 자동화된 결제 시스템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해 당황했다. <무한도전>은 남일이 아니었다.
- 결혼하려던 친구1은 일이 잘 안 풀리자 결혼자금으로 외제차를 샀다. 친구2도 결혼을 생각했던 여친과 헤어진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자 "차나 바꿔야겠다"며 외제차를 사겠다고 선언했다. 친구3은 "여자 친구도 없고 돈 쓸 시간도 없다"라며 차를 바꿨다고 말했다. 어째서인지 다들 차를 바꾼다. 뭔가가 안 풀릴 땐 차를 바꾸는 걸까.
- 명절이라고 외가에 갔다가 나서는 길이었다. 외할머니가 참기름과 담가뒀던 술통을 들고 나오셨다. 유리병에 담긴 참기름을 검은 봉지에 싸서 한 손에 들고 나머지 손에는 술이 담긴 소주 페트병이 들려있었다. 참기름과 술은 둘 다 절반을 조금 넘긴 양이 채워져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양손을 부들부들 떠셨다. 이전에 한 번 편찮으신 뒤 힘을 많이 잃었다고 들었는데 이게 그 여운인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알 수 없어 마음이 아렸다. 엄마는 내게 외할머니가 들고 오신 병들을 받아 드리라고 말해 외할머니에게 다가갔다가 힘겹게 병들을 쥐고 계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외할머니의 모발과 한껏 작아진 체구, 빠져버린 손아귀 힘 등이 머지않은 미래를 말하는 듯했지만 차까지 마중 나오신 외할머니에게서 나는 그 미래를 읽지 않으려 애썼다. 입김보다 따스한 햇살이 인상적인 시골의 정취가 어쩐지 슬픈 게 나 만이었나 싶다.
- 명절에 목돈이 나가서 상반기 지출 예상도를 그려봤다. 대략 아껴 써야 맞출 수 있는 예산 지도가 그려졌지만 어떻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일단 3월에 화이트데이가 있다. 3월인가 4월에 자동차 보험금으로 목돈이 빠져나갈 예정이고, 여자 친구의 생일도 상반기에 있다. 아버지 생신도 상반기인 데다 차량 점검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절약해도 절약한 티가 잘 안 나는 상반기가 될 것 같달까.
아니, 잠깐. 어버이날도 상반기에 조카들 어린이날도 상반기네. 다들 어떻게 돈을 모으는 거지?
- 4시간 자면 출근한다. 늦지 말자. 부디. 근데 발제 뭐 하지?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