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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끼 났다.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질병이 갑자기 발생했다. 안과를 갔더니 의사가 그랬다. "여름이라 요즘 비슷한 증상의 환자가 엄청 많네요" 이 흔한 질병을 이제야 접한다.
눈두덩이 부었다. 눈꺼풀 안쪽에 자리한 농양은 다행스럽게도 피부 외벽에 나타났다. 그래서 왼쪽 눈꺼풀이 잣을 품은 햄스터의 볼처럼 부풀었다. 딱히 고통이나 불편함을 수반하지 않아 심적 부담은 없는데 가끔 시야 위쪽에 볼록한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 같은 어색함이 있다.
의사는 약 처방을 통해 경과를 살피자고 말했다. 다래끼를 찢게 되면 "엄청 아프다"고. 3분 남짓 진료가 끝나고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넣는 약 두 개에 바르는 약 하나, 먹는 약이 3일치다. 온찜질도 잘해주란다. 병원을 나와 안약을 넣는데 조준이 힘들다. 눈이 작아 그렇겠거니, 어렵사리 치료를 시작해 본다.
동네에서 7720번 저상버스를 탔다. 곧이어 80~90대로 보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란히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한 손에 지팡이를, 다른 손에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노쇄한 몸을 지탱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는 일을 도왔다. 느릿한 걸음으로 버스에 먼저 올라 할머니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둘은 느린 걸음으로 좌석을 향했다. 버스 안 시간이 둘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흘러갔다. 버스기사는 가만히 문을 연 채 할머니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가운데 차량 엔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승객들 속에서 '노년의 속도란 한참을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 와중에 한발 한발 옮기던 어르신들은 마침내 자리에 착석. 아, 이 연로한 존중이란.
스르륵, 덜컹. 문이 닫히고 모두는 저마다의 시선을 거둔다. 무더운 여정 속에서도 그들의 여름은 안녕하길 잠시나마 바라본다.
애석하게도 모든 일정이 정지됐다. 이런 눈으론 외출도 힘들다. 병원에 다녀온 이후 약을 먹고 온찜질을 반복했다. 다래끼에 하얀 고름이 차올랐는데 병원을 가야 하는지 고민이다. 어제보다 눈꺼풀이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눈을 떠도 응어리가 느껴진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시야 일부를 가리는 다래끼가 밉다.
어차피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구직 활동은 지지부진했다. 도서관에서 책만 잔뜩 빌려와 책상에 쌓아뒀다. <우연의 설계>라든가 <그을린 예술>,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등 공들여 찾은 책들이건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염소뿔도 녹는다'는 대서의 위용을 자랑하듯 종이마저 끈적인다. 심지어 페이지와 페이지가 맞닿는 마찰음마저 열을 내는 것만 같다. 덥다.
카페라도 갈까 하는 고민도 이제는 무용하다. 살짝 끓인 물에 커피를 타고, 얼음을 세 조각 띄운다. 얼추 한 개 반 정도가 커피에 잠기면 얼음도 더 이상 녹지 않게 된다. 이때 우유를 부으면 어설프게나마 아이스 라테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집 커피로 근근이 하루를 버틴다. 선풍기와 에어컨과 시간을 친구 삼아 독수공방 한다.
내가 리코 GR2를 산 건 어디까지나 휴대가 용이해서다. 이전처럼 카메라와 렌즈, 스트로보를 줄줄이 챙기지 않아도 된다. '똑딱이' 크기로 DSLR 중급기 정도 결과물을 보여준다. 물론 DSLR의 조작 편의성과 렌즈군 등을 포기할 경우 가능한 선택이다. 다만 이것도 감각 따위가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라 요즘은 찍는 것마다 죽 쑨다.
사진기자로 일할 때 선배가 그랬다. "좋은 장비 주면 누구나 다 잘 찍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업으로 사진을 찍다가 개인 장비를 써보니 알겠다. 좋은 장비론 확실히 찍기 편하다.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로 찍을 때 들이는 노력보다 훨씬 품이 덜 든다. 그래서 원하는 사진을 찍을 가능성이 커지고 그만큼 잘 찍을 확률도 높아진다.
반면 장비가 같아도 찍는 사람에 따라 사진에 큰 차이가 생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시각이다. 작가는 글로 말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면 사진가(사)는 사진으로 말한다. 수단은 달라도 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장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개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성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노오력.
카메라를 나갈 때마다 지니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비슷한 장소나 시기라도 꾸준히 다르게 찍어보려 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야 한다. 카메라를 상대에게 들이대는 행위는 꽤나 공격적이다. 소위 말하는 '좋은 작가'는 상대가 느낄 수 있는 이 공격성을 불식시킨다. 그래서 좋은 표정과 자연스러운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게 부러워지는 요즘이다.
그래도 기자를 했었으니까 나도 좀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해왔다. '아무리 못 찍어도'라든가 '그래도 내가...' 같은. 돌이켜 보면 숨고 싶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진작가들이 있다. '포토그래퍼'라고 하면 어딘가 낯간지러워 작가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이 바닥을 다시 가늠하는 중이다. 어지간히 잘 찍는다. 그런 사람이 또 많다. 어쩔.
한 때나마 사진작가나 포토그래퍼라는 직함을 쓰며 홍보를 하는 사람들의 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의외로 결과물이 평이해 놀랐던 적이 있다. 그래서 오만이 곧 내 포지션이 돼 버렸다. 그게 최근에 깨졌다. 이 바닥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스펙트럼도 넓었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판단해버린 거다. 타인에겐 줄곧 곧은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을 경계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다.
모기와 더위가 겹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날이 부쩍 많아졌다. 자다가 일어나서 에어컨을 켜고 다시 자는 식이다. 그러다가 수면 흐름이 끊기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어제도 새벽 4시가 넘어 눈을 뜨고 말았다. 에어컨을 껐다 켜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발과 팔은 이미 모기의 만창장이 되고도 남을 상태.
더위는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에어컨으로 이길 수 있다. 모기는 잡아도 또 나온다. 출처를 모르겠다. 에어컨을 켤 때 창과 베란다 문 등을 밀폐하기 때문에 들어올 구멍이 없는데 어디선가 나타난다. 심지어 화장실 문도 닫고 싱크대 배수구도 뚜껑으로 막아놨다. 그런데도 온다. 이 신출귀몰한 생명체를, 가을이 치워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어제는 어디선가 담배 냄새도 올라왔다. 비흡연자들은 대체로 담배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그렇다. 가끔 대중교통에서 담배 냄새가 심한 아저씨 옆에 앉으면 목이 아플 정도다. 그런 내가 새벽 4시에 깼는데 담배 냄새를 맡았다. 덥고, 모기는 날아다니는데 잠은 못 자며 자기 방 한복판에서 비흡연자가 담배 냄새를 맡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이 와중에 눈꺼풀에 붙은 다래끼는 왜 이리 혹처럼 걸리적거리는 건지. 상황이 시트콤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울어도 시원찮은 판국에 말이다.
학보사 조교로 일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학보사 기자가 동아리들의 신입생 모집 문구를 문제 삼았다. 동아리의 성격이나 활동도 밝히지 않은 채 술을 사준다든가 엠티를 잘 간다는 내용 등으로 신입생을 유혹하는 행태를 보도했다. 주로 활동이 뚜렷하지 않거나 비인기 동아리에서 주로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기사가 나간 후 기사에 언급됐던 한 동아리 회원들이 학보사로 찾아왔다. 가장 나이가 많은, 당시 서른 살 먹은 회원과 남자 셋이 학보사를 방문했다. 그들은 따졌다.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는 항의였다. 기사에 동아리 이름이 언급된 게 기분 나빴다는 이야기다. 잘못은 했지만 이름이 노출된 건 억울하다(=화난다)는 거.
이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찾아와 사실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담당 교직원 선생님은 조용히 문제가 해결되길 바랐다. 갑론을박해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달래서 돌려보냈다. 내 상식으로는 보도가 나가면 동아리 연장자들이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근데 화를 내다니.
최근 벌어지는 사회 문제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너도 잘못하고 나도 잘못했지만 상대의 잘못부터 처벌하라는 논리다. 심지어 상대에 비하면 내 잘못은 별 거 아니라는 식의 입장도 보이고 있다. 이게 그들의 진심인지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몇 년 전과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기자를 그만두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저 전처럼 많은 일을 하며 시간에 쫓겨 살고 싶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게으르게 살고 싶단 욕망이 이때 발현됐고, 이후 적당히 살기 위한 길을 찾아왔다. 적당히 벌며 자기 시간을 최대한 중력에 맡기는 삶을 살려고 다짐 아닌 다짐했다. 그게 변했다.
노동과 보상 간 상관성을 따져볼 때 시간 대비 적은 소득을 거둔다고 자기 시간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소득도 적고 시간도 없을 확률도 있다. 게다가 소득이 적은데 시간이 많을 때 남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줄어든다. 여가의 질을 확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잘 놀고 잘 먹는 건 내게 중요하다. 더불어 잘 자는 것도 놓칠 수 없다. 의식주에서 '식'과 '주'에 방점이 찍힌 건데, 두 가지를 충족하면 입는 것에도 관심이 가기 마련일 테다. 그렇게 볼 때 적당히 사는 게 올바른 방향인가 생각해봤다. 아니다. 아니 무리다. 적당히 살아선 잘 놀 수 없다.
놀고먹을 때 힘을 뿜뿜 내기 위해선 뭐라도 이루든가 그만한 수익이 필요하다. 심지어 강아지도 입양할 거라서 강아지 몫까지 더 벌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 이상의 강도 높은 일을 참아내야 한다는 수사가 이럴 때 불쑥 떠오른다. 할 수밖에 없나 싶다.
너무 오래 묵혀뒀던 열정을 다시금 꺼내려니 겁도 난다. 제대로 된 동기 부여 없이는 다시 뛰기 힘들지도 모른다. 가능성과 노력의 질 면에서 힘들 때마다 과거와 비교하게 될 게다. 그럼에도 쌓인 먼지를 털고 가늠자를 들여다본다. 목표가 있으면 뭘 해도 한다. 될 놈은 결국 행동에서 판가름 난다 하지 않나.
하지만 벌써 귀찮아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