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달볶+@]
제주로 이주한 지 5년째 접어든 해.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남편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막 농사의 재미를 알게 된 나로서 퍽 서운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이었다. 제주의 무시무시한 땅값 때문에 농지 매매는 언감생심, 어떻게 땅을 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내 사정을 알게 된 옆집 할머니께서 노는 땅이 있다며 빌려 줄 수 있다고 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농사야 나이 들어서 지을 수 있지만 남편에게 온 기회는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거니까, 단념했다.
서울은 전보다 더 삭막해져 있었다. 전염병이 유행하던 때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제주에서는 한 번도 안 걸린 코로나를 오자마자 온 가족이 신고식 치르듯 돌아가면서 걸렸다. 거기다 도무지 날씨에 적응이 안 되었다. 3월이면 슬슬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따사로운 서귀포와는 달리, 서울은 공기에 늘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어서 오래 걸으면 살이 아려 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삼십 년간 나고 자란 내 고향, 서울인데 나는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시 적응에 힘이 부쳤다. 거리의 휘항한 불빛들 아래 줄 지은 상점과 너무 많은 사람들, 빽빽한 차량과 소음과 무거운 공기 등, 모든 게 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밖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집에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과 바다, 매일이 다른 하늘과 볕과 그늘과 활보하는 바람의 결, 무엇보다도 제주도 사람들, 그리고 친구가 그리울 때마다 수시로 울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사이좋게 붕괴된 채로 추운 계절이 빨리 가기만 기다리던 어느 날, 공황이 찾아왔다. 광화문의 한 대형 카페에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카페 안 사람들 목소리가 엄청나게 커져서 내 머릿속에 왕왕 울려 댔고, 눈앞이 뿌예지면서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보였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 살 것 같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앉은자리부터 출입문까지 5m도 채 안 되는 거리였는데 나는 미로에 갇힌 거처럼 우왕좌왕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필 점심시간 직후라 갑자기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다. 겨우 밖으로 나와 계단에 주저앉아서 숨을 고르니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혹 공황 발작 아닐까, 싶기도 했으나 달리 어떤 조치를 취할 여력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생활환경에 애들은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남편도 여러 사람과 일하게 되면서 연달아 코로나를 두 번이나 걸려 그 어느 때보다 쇠약해지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었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볼륨을 높이는 거처럼 점점 커졌고, 호흡 곤란이 왔다. 그때는 다행히 남편이 옆에 있어서 좀 더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병원을 찾았다. 정신과는 처음인지라 적잖게 긴장이 되었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작은 병원이었는데, 이른 아침인데도 대기하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접수부터 했다. 간호사는 나에게 두 장짜리 설문지를 건네며 작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 안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 펜 한 자루, 들판이 그려진 작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설문지에는 수면 시간과 최근의 감정 상태 등 정신과에서 의례 물어볼 법한 질문이 적혀 있었다. 답을 적은 후 밖으로 나가니, 그 사이 대기자가 한 명 더 늘어나 있었다. 기다란 소파에 딱 한 자리 비어 있어 거기로 가 앉았다. 그런데 나의 왼쪽에 앉은 여성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옆에 앉은 게 불편해 그런 듯 해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더니 곧 긴 머리칼이 땅에 닿을 정도로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적잖게 당황한 나와 달리, 프런트의 간호사들은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기는 했으나 어쩐지 좀 익숙하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 진료실에서 환자가 나왔다. 체크 셔츠에 멋스러운 모자를 눌러쓴, 단정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그가 나오자마자 간호사는 다음 환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러자 내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넵!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지퍼마다 플라스틱 키링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환하게 웃으며 진료실 문을 여는데, 그 미소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더 안타까웠다. 나는 속으로 요즘 20대들, 참 힘들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는 어쩌자고 이 나이 되도록 누군가 놓쳐 버린 풍선처럼 붕붕 거리며 살고 있는 걸까, 서글퍼지기도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의사는 환경 변화로 인한 일시적 증상일 수 있다며 항 우울제와 신경 안정제, 수면제를 처방해 줬다. 내가 약을 먹으면 공황 증세가 오지 않느냐 물었다. 그는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 도움은 될 거라 답했다. 약국에 가 2주일치의 두툼한 약봉지를 받아 밖으로 나왔다. 코트의 주머니에다 약봉지 넣고서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걸으니 안심이 되었다.
약을 복용한 일주일 간, 발작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졸렸다. 커다란 장막이 나를 뒤덮고 있는 거처럼 몸이 무거운 데다 걷다가도 두 눈이 가물거렸다. 앉을만한 벤치라도 보이면 그저 픽, 쓰러져 자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밤이 오면 그제야 장막이 걷어진 거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밝아져 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학교로부터 언제 아이들 데리고 가라는 연락이 올 지 모르기 때문에 늘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 내게는 공황 발작만큼이나 불안한 거였다. 일단 약을 먹지 않고 견뎌보기로 했다. 공황보다 더 무서운, 공황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른다는 그 불안감을.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생리 전후에 챙기는 철분제를 사러 갔는데, 내 안색을 살피던 약사가 철분이 부족하면 두통 말고도, 다른 여러 증상이 동반될 수 있으니 철분제를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20대 때 딱 한 번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다. 바빠서 잘 먹지 못하고 생리까지 겹쳤을 때였는데, 그때 내가 빈혈 수치가 낮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때 말고는 빈혈로 인한 가벼운 두통 정도를 안고 살뿐,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빈혈은 우울감과 호흡곤란, 심장 박동 증가 등 다양한 증상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빈혈이 이렇게까지 내 몸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내 공황 증세가 철 부족 때문이었다,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그렇게 믿으니 항우울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철 섭취에 전보다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철분제를 복용했다. 공복에 먹는 게 좋다고 해서 가급적 아침에. 또 철 함량이 높은 음식을 잘 챙겨 먹었다.
시금치, 렌틸콩, 건포도, 새우, 계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붉은 살코기 등. (사실 나는 고기를 잘 먹지 않아서 이 부분에 타협이 어렵긴 했다. 그래도 조금씩, 자주 먹는다는 생각으로 늘려갔다) 다소 중구난방의 식재료지만 토마토 한 알과 함께 볶으면 그것이 훌륭한 소스가 되어 모두 다 잘 어우러지게 만들어주었다.
2년 전 겨울처럼 심각한 공황 증상은 더 이상 없지만 나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쇠약해질 때 심장이 터질 거처럼 빨리 뛸 때가 있다. 역시나 주변 소음에 취약해지고, 어떤 절망감이 온몸 구석구석 스민다. 그럴 때 가장 먼저 호흡을 의식해 본다. 그러면 내가 마치 물속에 있는 거처럼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숨을 고른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가급적 잘 챙겨 먹고 푹 쉬려 한다. 그전까지 나는 내 마음이 풍선 같은 거라 여겼다. 푸쉬시, 바람이 빠지면 쪼그라들고, 또 너무 팽창하면 언제든 펑, 터져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무언가로. 그러나 몸을 돌보면 마음도 나을 거라는 믿음은, 언제는 내 두 손으로 내 마음을 단단하게 살피고 지키며 위할 수 있음을 뜻했다. 이제는 마음이 무너질 때는 몸부터 살핀다. 몸은 마음의 바깥, 마음은 몸의 안쪽이니까.
토달볶+@ 간단 레시피
① 토마토와 채소, 베이컨이나 새우 등을 볶는다.
② 토마토를 팬 한쪽에 밀어 넣은 후 계란을 넣어 익힌다.
③ 계란이 포슬포슬 익으면 다함께 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