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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가희 May 31. 2022

멍이 부족해

멍때리기 고수님, 방법을 알려주세요.

분류화되지 않는 주제가 머릿속을 떠돌고, 밤이 되면 주체가 안 된다. 깊이 파고들수록 신나는 주제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고민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무 생각을 안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생각 분량을 자기 의지대로 조절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고 싶다.


책을 읽거나 TV 프로그램을 보건 생각거리를 만든다. 분명 매체를 접하고 그 안에서 의견을 갖는다는 건 재밌는 일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무언가를 느껴야만 한다'라는 강박감이 있어서 개그나 예능을 보고도 마음 편히 웃기만 하질 못한다. 좋은 습관을 갖기는 이렇게 어려운데 놓아주고 싶은 습관은 왜 이리 안 떨어지려고 하는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독서'라고 답한다. 읽기뿐 아니라 소장하는 것마저 좋아한다. 읽어야 할 책이 책상이며 침대 머리맡이며 쌓여 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짐이 책이다. 한 달에 에세이 세 권을 읽겠다고 계획한 날. 한 책이 며칠째 읽히지 않았다. 읽으려고 애를 써도 글자만 스쳐 지나갈 뿐 기억에 남지 않았다. 집중이 흐트러져서인가 싶어 소리 내어 읽어 봤다.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자 흥미를 잃었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앞장을 몇 번이고 돌아가서 읽는 과정을 하다 보니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이 한마디 했다. 책을 읽는데 왜 그렇게 괴로워하냐고 물었다.

"책을 읽으면 항상 질문이 있고, 느낀 점이 있어야 하는데 완독을 못 하겠기에. 심지어 집중도 안 되고, 재미도 없어서 미치겠어. 그래서 감상이 나올 때까지 다시 읽고 있어"라고 답했다.


언니의 이런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와중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1. 꼭 책을 끝까지 읽어야만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2. 안 읽히는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하는가?

3. 읽는 도중에 흥미를 잃거나 재미없어서 중단하는 건 느낀 점이 아닌가?

곧바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생각을 강요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을 들었다. 특별한 생각 없이 몰두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어떡해.


처음 사 본 슬라임랩 슬라임(왼쪽)과 최근에 재구매한 슬라임쿡 슬라임(오른쪽)


가장 먼저 슬라임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나오지 않고, 말도 안 한다. 그저 조물조물하는 장면을 보고 듣는 게 전부다. 무슨 느낌일까, 어떤 향이 날까 정도 상상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간다.


더 이상 볼 영상이 없나 싶을쯤 인스타 마켓에서 슬라임을 주문했다. 풀 조합이나 재료에 따라 촉감이 다르다. 내 손에 잘 맞는 촉감을 찾을 때까지 여러 마켓에서 주문했다. 역시 취미생활을 유지하는 건 돈이 든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슬라임을 찾았으니 됐다. 조물조물 만지는 동안에는 별 생각이 안 든다. 가볍게 지나치는 감상뿐이다. 청소를 마치고 또는 공부 하기 전에 슬라임을 꺼내 든다. 최근엔 영상을 보면서 만지기도 한다. 슬라임을 활용한 생각 멈추기에도 단점이 있다. 일단 풀과 붕사가 주재료라서 수시로 손을 씻어야 하고,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재활용 불가한 쓰레기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다른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모래시계를 주문했다.  가운데가 납작하게 폐인 모래시계랑 다르게 원형 모양이라 떨어지면서 매번 다른 모양을 만들어준다.

불멍, 물멍처럼 모래멍.

멍하고 싶어서 멍할 일을 찾아 헤메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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