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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Feb 22. 2024

외국어 공부의 쓸모

중국어와 사랑에 빠진 지난날

중국어와 사랑에 빠진 건 내가 좋아서 다가간 것보단 수많은 스승들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공공경제학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늘 강의실 맨 앞자리에 중국인 유학생들을 앉혔다. 교수님은 종종 자신이 중국에 대해 아는 정보들을 유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어느 날 강의자료엔 '공리(功利)'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공리(功利)라. 중국의 대배우 공리(巩俐)가 생각나네. 요즘 대학생들은 공리라는 배우를 알고 있나? 엄청난 배우인데. (맨 앞자리에 앉은 중국인 유학생을 가리키며) 공리(功利)랑 공리(巩俐)는 다르잖아. 중국어로 발음 한 번만 알려줄래? 구분할 수 있게."

또 어떤 날은 제2외국어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2외국어 배워둬. 인생에 도움이 거라고 분명히. 외국어를 알면 경제학만 배워서는 얻지 못할 다른 기회들을 잡을 수 있어."


휴학 계획을 세우고 있던 나는 교수님의 그 말 한마디에 바로 중국어와 인연을 맺었다. 신촌의 P어학원에서 시작한 기초중국어 공부는 쑤저우 유학까지 이어졌고, 귀국 후 중국인 외교관들과 일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워두니 큰돈 좀 벌었냐고? 그럴 리가. 벌긴 벌었는데 전혀 큰돈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돈을 벌기도 전에 외국어 공부에 대한 현실과 편견을 떨지 않고 마주해야 했다.

(현실 1) 중어중문학과 친구들은 취업이 어려워 복수전공이나 전과를 한다.
(현실 2) 통번역대학원 졸업생이 아니면 언어 전문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편견 1) 한국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한 조선족이 있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은 취업시장에서 가치가 없다.
(편견 2) 요즘은 챗GPT나 파파고 같은 AI기술이 있어서 인간이 통번역하는 시대는 지났다. 통번역가의 몸값은 점점 하락할 것이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언어에게 부를 가져 다 달라고 바라기엔 이번 시대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 밥벌이도 안 되는 쓸모없는 외국어 공부는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할까? 만약 중국어 공부가 나에게 가져다 줄 돈만 생각했다면 나는 절대로 꾸준히 공부하지도, 실력을 쌓기도 어려웠을 거다. 그렇다면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보통 인간의 삶에서 외국어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와 사랑에 빠지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관계의 확장

아직도 기억난다. 쑤저우에 가기 전 같이 공부한 조선족 선생님이 나에게 남긴 말이.

"혜림 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중국에 가면 반드시 귀인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외국어 공부는 당신의 삶에 귀한 인연들을 가져다줄 수 있다. 같이 외국어 공부를 하는 도반, 선생님, 쑤저우에서 유학하며 만난 외국인 친구들, 여행을 하며 친구가 된 중국인들, 첫 직장에서 함께 일한 외교관들 등. 나는 중국어를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을 하며 지내는데, 당시 언어라는 소통 체계가 우리를 얼마나 깊고 견고하게 이어줬는지 새삼 실감한다. 영어로 어설프게 소통을 했다면 과연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사람이었을까? 언어가 가져다준 인연들은 나의 스승이자 강한 학습동기였다.


세계의 확장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가 생기면 보이고 들리는 것이 달라진다. 외국어 속엔 그 나라의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언어만 표현해 낼 수 있는 개념이나 정서가 있다. 외국어 공부의 단계가 한층 올라가면 한국어로 쉽게 번역해 낼 수 없는 고유한 것들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 나라의 작품(영화, 드라마, 음악, 문학작품 등)을 감상할 때 깊이가 달라진다. 내가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고, 그동안 모국어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앎들이 깨어난다.


자아의 확장

외국어 공부는 끝없는 계단 오르기와 같다.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 구간을 마주하고, 그 구간들을 깨뜨리고 넘어서 나를 바꾸고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어로 일을 하던 시절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내 모습들을 발견했다. 오해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 말을 잘 고르는 나, 상대방이 나의 느리고 부족한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게 신경 쓰며 발화하는 나를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아무래도 외국어로 일을 할 땐 자주 긴장을 했던 거 같다) 내가 당황할 때마다 나오는 언어 습관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실력이 늘 때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스터디, 번역서 등 뭐든 푹 빠져들었는데······. 순간 찾아온 깨달음!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사람이었어?


외국어를 통해 당신이 넓혀 놓은 세계가 알아서 인연이든 부든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니 즐겁고 재밌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아무튼, 과거에 왜 중국어와 사랑에 빠졌냐고?

그는 참 정직하기 때문이다. 인간 간 사랑은 노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결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비효율적인 사랑이다. 언어-인간 간 사랑만큼 정직한 사랑이 있나 싶다. 애정을 쏟은 만큼 나에게 돌아온다. 언어는 내가 과거에 얼마나 공부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애정을 쏟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멈추는 순간 휘발되고 말 테니까.


이젠 중국어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은 추억이 되었다. 예전만큼 말하기와 쓰기에 능하진 않다. 원서를 읽어도 속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추억은 음미할 수 있다. 몸에 새겨져 있는 만큼 맘껏 음미한다. 다시 그와 열렬하게 사랑에 빠질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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