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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Feb 08. 2024

외길 커리어, 다갈래의 커리어

정답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

이 친구 구멍이 참 많다.

부장이 나의 업무 스크리닝을 전부 사수에게 맡기며 말했다. 사수의 얼굴을 잠깐 쳐다봤는데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몸속의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입사한 지 겨우 한 달이 된 나를 평가한 부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다.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듣고 인지하라고 말이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교부금, 지원사업, 예산, 공모, 과업지시서···. 전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고, 낯선 업무였다. 사수는 공공기관 근무 경험도 없는 내가 뽑힌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새로운 직원의 업무까지 알려줘야 하다니. 이 직장에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로 늘 새 직원을 담당하는 게 본인이 지목되는 것이 몹시 분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채용되었다는 걸 민망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직전의 타국 정부기관에서 하던 번역업무는 얼른 머릿 속에서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문과 출신의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의심한다. 대학원을 가지 않는 이상 대학 전공과 직업이 연결되기는 어렵다. 결국 할 수 있는 직무를 찾아 사방면으로 흩어져서 일을 한다. 나는 공공기관에서 행정뿐 아니라 사업 기획, 홍보, 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를 체험했다. 특히, 돈이 없는 작은 규모의 기관에서는 담당자가 몸을 갈아 넣어 모든 업무를 해내길 기대하는데, 나는 과거의 나를 성실히 갈아 넣은 결과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해본 직무의 가짓수는 늘어났지만 뭐 하나 뾰족하게 '전문적으로 했다'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최근 프리랜서로 강의 기획·제작 업무를 하며 나와 맞는 직장을 탐색하고 있다. 구직플랫폼에 이력서를 열어놓았는데 별의별 입사제안을 다 받고 있다. 학원 상담직, 컨설팅, 전략기획, 구매관리 등···. 특이한 건 내가 해보지 않은 업무라도 입사제안이 계속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곳저곳 발자국을 찍으며 온갖 직무를 경험해 본 내 경력기술서를 봤을 때, 이쯤 되면 그냥 '뭐든 닥치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저것 다 해본 나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해보라고 했다.

"네 성향으로 봐선 조직생활은 오래 못 한다. 재주도 좋으니 이참에 네 사업을 해보는 게 어때?"

나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없어서 사업은 아직이라며 둘러댔다. 이젠 나의 먹고사는 삶에 뭐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지, 난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안개가 잔뜩 낀 날 터널 안을 헤매는 것처럼 모호하다.


전문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면 늘 답을 내리지 못하고 끝난다. 지난겨울,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난 나의 지인 W실장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당시 나는 잠깐 일했던 세 번째 조직에서 막 도망쳐 나왔다. 다시 일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뭐 하나 뾰족하게 잘하는 게 없는 것 같고,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지도 못했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했다고. 부정적인 조직 경험의 잔상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어서 바로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된다고. 돈도 안 되는 개인 창작 활동을 하는 게 맞는지, 번역이라도 해서 용돈을 벌어야 할지. 아니, 번역은 AI가 나보다 잘하니 이게 돈이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난 통번역대학원을 나온 사람도 아닌데 나 같은 사람을 써주겠냐며 암울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를 털어놨다.


W실장님은 차분히 말을 건넸다.

이제 40대가 된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과거의 내가 점찍었던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나의 일들이 이어지는 순간들이 와요.


커리어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한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지긋하게 일하며 대리 정도의 직급을 달면 나름의 전문성이 쌓이지 않았을까? 라며.

분명한 건 한 가지 길만 걷는 것의 위험도 있다. 특히,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는 나 같은 성향의 인간에게 말이다.

내가 이거 말고 뭘 할 줄 알지?

평생 이 일만 해야 하는 건가?

이 일만 했는데 어딜 갈 수 있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싫어지면 어쩌지?

그땐 새로운 일을 배워서 시작하기엔 늦지 않을까?


최근 대학 동기 S를 만났다. S는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데, 수명이 짧은 개발자군 직업 특성상 여러 개의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직업으로 꼽히는 개발자인 S조차 고민을 했다. 사실 S와 내가 하는 고민은 평생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기본적인 매일의 과제에 불과하다.


지금껏 나는 한 가지 길로 걸어오지 않았다. 내 발자국은 여기저기 사방에 찍혀 있다. 다갈래 길로 들어온 이상 나는 나의 모양, 나의 고유한 지도를 그릴 수밖에 없다.

어떤 모양일지 모르지만 선명하게만 찍어놓는다면 언젠가 이 발자국들이 이어질 거다.

외길이든 다갈래든 적어도 내 삶에선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이고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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