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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Jan 26. 2024

Nothing or All

잘하는 게 없거나, 모든 걸 잘하거나

 리무 씨는 명문대를 졸업했다. 말 그대로 '졸업만' 했다. 대학 시절의 리무 씨는 문과의 꽃이라 불리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렇다. 리무 씨는 경제학을 '전공으로만' 공부했다. 그는 경제 관련 글과 뉴스를 편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상은 읽어내지 못했다. 읽으려 하지 않았다. 특별한 금융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았다. 금융권으로 취업한 다수의 학우들을 보며 리무 씨도 한 때 금융권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슴이 전혀 두근거리지 않네?'

리무 씨의 길이 아니었다. 금융권의 여러 회사들도 손을 내저으며 리무 씨를 놓아줬다.


 리무 씨는 중국어를 할 줄 안다. 말 그대로 '할줄만' 안다. 리무 씨는 이십 대 때 많은 시간과 돈을 중국어 공부하는데 투자했다. 일명 '차이나테크'였다. 리무 씨는 여느 중어중문학과 학생들보다 중국어를 잘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어린 리무 씨는 여러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중국어 공부해 봤자 조선족은 절대 못 이겨.'

언어를 몹시 사랑하는 마음을 일에 담고 싶었을 뿐인데, 리무 씨는 본의 아니게 조선족과 경쟁하다가 실패할 사람이 되었다.


 리무 씨는 공공기관에서 프로젝트 관리를 했던 사람이다. 예산을 받고, 연간 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에 따라 사업을 실행하고 사업을 정산하고 평가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관리 실력이 좋아도 리무 씨의 힘으론 넘을 수 없는 산이 있었다. 바로 '정치'였다. 리무 씨의 사업 예산을 잡고 있는 지방정부는 프로젝트가 잘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 프로젝트, 우리 당이랑 색깔이 같나?'

한 땀 한 땀 촘촘하게 관리한 프로젝트는 현재 지방정부의 색깔과 다르면 별 볼일 없는 사업이 되어버렸다. 색깔이 같을 경우엔 규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 들며 엉성한 계획에 흥청망청 예산을 쓰더라도 리무 씨의 프로젝트는 지방정부에서 확실히 밀어줬다. 리무 씨가 맡는 일은 늘 정치에 흔들렸다.


 아, 리무 씨는 업무에 필요한 글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고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실력이 고만고만할 것이 분명하다. 이젠 기대가 없다. 그렇다. 그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잘 해낸 것도 딱히 없어보인다. 이것저것 애매하게 잘하는 리무 씨는 전문성을 갖춘 인재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연 그럴까?

 리무 씨는 무려 경제학도다. 그는 대학 시절 머리를 쥐어뜯으며 전공공부를 했다. 특히, 수학과 통계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리무 씨에겐 대학 시절의 전공공부보다 두려운 게 없다. 그에게 수식과 통계자료가 잔뜩 들어간 경제 관련 연구자료를 던지면 그냥 읽는다. 학부 시절의 전공 지식은 많이 잊혔고, 금융 전문가도 아니지만 리무 씨는 그저 겁 없이 빨아들이듯 본다. 경제학을 전공하기 전과 후의 차이는 그 학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느냐 없느냐니까.


 리무 씨는 언어를 몸에 새길 줄 아는 사람이다. 본인이 이해한 외국어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낼 줄 안다. 학식 높고, 배경 지식 많고, 한국어에 능한 리무 씨는 잠재력이 가득한 번역가다. 언어에 대한 사랑이 넘쳐 그는 종종 한국어와 중국어의 징검다리를 퐁퐁 넘나 든다. 중국어 팟캐스트를 들으며 정보를 습득하고, 중국어 자막만 있어도 드라마 속 인물과 상황에 한없이 빠져들 수 있다. 무엇보다 리무 씨는 방언이 심한 중국어에도 겁내지 않는다. 그렇다. 리무 씨는 어느 중화권 출신의 사람이든 친구가 될 수 있다.


 리무 씨는 예리하고 날카롭게 프로젝트를 관리해서 자칫하면 베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그는 규정이나 지침 같은 문서를 무섭게 해독한다.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다. 예리한 리무 씨는 프로젝트를 점검할 때 오류를 빠르게 발견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프로젝트 실행에 차질이 생길까 봐 늘 예의주시한다. 리무 씨 말론 그간 공공기관에서 정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생긴 습관이라고 한다.


 그는 글을 잘 쓴다. 프로젝트를 할 땐 보도자료를 직접 썼고, 카피 또한 외주를 주는 것보다 본인이 잘 쓴다고 자부했다. 리무 씨는 말을 꽤 한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시 메시지와 전달력을 중요시한다. 퍼포먼스에 집착하지 않는다. 청중과 당돌하게 눈을 마주하며 발표하는 이야기꾼이다. 리무 씨를 무대 위에 던져보면 알 수 있다. 이 양반, 무대 체질이네?


 무엇보다 리무 씨는 자신의 일에 의미부여를 잘한다. 본인의 영역에 있는 업무는 권한을 우선 챙긴 후 강한 책임감으로 임한다.


 아. 리무 씨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할 줄 아는 게 꽤나 많다. 아니다. 리무 씨는 모든 걸 할 줄 안다. 그는 꽤 믿음직한 인재다.


※ 개인 사정으로 연재가 하루 늦었습니다. 앞으로 주어진 일주일 동안 일에 대한 고민을 부지런히 하면서 늦지 않게 연재하겠습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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