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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Jan 18. 2024

문과족 리무 씨의 직장 표류기 - 프롤로그

"대학을 바로 졸업하는 게 어째서 경력단절이야?"

"그야 졸업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공백기가 생기니까. 경력단절이 맞지. 그래서 다들 수료 상태로 남아 있는 거야."

7년 전의 여름이었다. 졸업을 결정하고 곧 짧은 어학연수를 떠날 리무 씨는 선배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 경력단절 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어안이 벙벙했다. 리무 씨는 어딘가 불편한 지 몸을 들썩거리며 입고 있는 여름용 블랙 롱 스커트를 만지작 거렸다. 하지만 리무 씨는 알고 있었다. 롱 스커트가 아니라 선배의 말이 불편하다는 걸.


리무 씨는 자신의 소망대로 졸업 후 꿈에 그리던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고작 반년이었지만 해외에 더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원 없이 공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행했다. 귀국하자마자 리무 씨는 졸업한 모교의 취업센터에 방문했다.

"지금 취업 시장이 어떤지 모르는 애들이 꼭 당돌하게 졸업하고 나서 후회를 해."

한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대기업과 공기업에 취업시켰는지 아냐며 자랑을 해대던 담당 교수가 리무 씨에게 뱉은 유일한 한 마디였다. 스물다섯의 리무 씨는 정말 자신이 멋모르는 줄 알았다. 그는 종종 학교 취업센터에 가 그 교수에게 상담을 받았다.

"교수님. 전 외국계 기업에 가고 싶어요."

"우선 취업하고 싶으면 학교 근처에 고시원 하나 구해서 당분간 이 근처에서 살아. 그리고 NCS부터 공부하고."

"어... 저는 공기업 말고 외국계 기업 쪽으로 지원하고 싶은데 제가 더 준비할 건 없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선 되는 대로 다 지원해."

대학을 덜컥 졸업부터 한 당돌한 리무 씨는 교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리무 씨는 국내의 저명한 국책연구원 인턴직에 지원해 서류통과를 했고, 마지막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인턴경험이 전무한 리무 씨는 합격하고 싶은 마음에 그 교수를 찾아갔다.

"이상하네. 이런 자소서가 서류 통과 했다는 게."

리무 씨는 교수의 말대로 면접에서 떨어졌고, 그 이후로 모교 취업센터를 영영 찾아가지 않았다.

그 해 리무 씨는 처음으로 구직 시장이라는 바다를 표류했다. 리무 씨의 첫 항해는 어둡고 우울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무 씨를 정착시켜 줄 것처럼 얘기한 직장이란 섬들은 결국 리무 씨를 선택하지 않았다. 몇몇 섬은 잠시 방문한 리무 씨에게 어떤 업무 역량이 있는지 보단,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은 없는 지를 더 궁금해했다! 스물다섯에 어리숙한 리무 씨는 몸에 잔뜩 생채기가 났고, 염증이 더 나기 전에 표류를 멈추기로 했다.


"생활력이 참 좋으시군요. 아주 맘에 들어요."

그 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시기였다. 외국계 기업에 가고 싶어 했던 리무 씨는 면접을 본 어느 외국계 기업의 인재추천을 받아 외교관과 티타임을 할 기회가 생겼다. 리무 씨는 어학연수에서 즐겁게 공부한 모든 역량을 발휘해 외국어로 두 외교관과 티타임을 즐겼고, 여태껏 본 면접 준 가장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리무 씨는 이국의 정부 기관에 정착을 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표류를 멈췄다.

이국 정부기관에 이어 자국의 민간위탁기관까지. 리무 씨는 4년 반을 쉼 없이 일했다. 특히, 두 번째로 정착한 민간위탁기관에서는 저임금 고강도 업무를 했던 리무 씨의 심신은 많이 지쳐있었다.


'바로 항해를 시작하면 바닷속에 잠겨버릴지도 몰라.'


리무 씨는 스스로에게 쉼을 허락했다. 마침 창작 욕구가 샘솟던 시기였고, 리무 씨는 마음껏 여행하고, 원하는 창작을 실컷 한다면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리무 씨는 불안해져 갔다.

'나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고 싶어. 동료들과 보냈던 진한 일상들이 그리워.'

직장을 다닐 때 보다 비교적 한가해진 리무 씨의 일상엔 별일 아닌 게 별일이 되는 별일이 발생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이라도 일을 하고 싶은데. 리무 씨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생활은 본인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식이 5개월을 넘어갈 때쯤 리무 씨는 다시 탐험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섬은 리무 씨가 언젠가 꼭 와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신이 난 리무 씨는 자신의 앞날에 황금 비단길이 깔려 있을 거라 생각하며 예쁘게 걷는 연습만 했다.


황금 비단길은 무슨. 가까이 가보니 황색 진흙이 흘러내리는 함정이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은 리무 씨를 환영하지 않았다. 우린 원래 이런 식으로 일해. 굴러 들어온 네가 따라야지. 우리 방식에 시비 걸지 마. 리무 씨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어느 날 리무 씨의 속은 곪아 터져 버렸고, 노란 진물이 흐르고 넘쳐 이불을 적실 지경이었다.

'이 섬을 떠나야겠어.'

리무 씨는 최대한 빨리 본인의 일을 정리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과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다른 모험자와 함께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떠났다.


리무 씨는 더 이상 모험을 할 에너지가 없었다. 바닷물이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어느 섬에든 정착하겠지. 리무 씨는 배 위에서 곪아버린 마음을 치유하는 데 집중했다.

'우리 섬에 와볼래? 일은 조금 씩만 해주면 돼.'

오래전부터 어떤 섬에 먼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리무 씨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섬을 향해 항해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발견하며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곳은 리무 씨와 같이 먹고살 길을 찾아 표류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기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는데, 리무 씨는 그제야 항해의 의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해. 의미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 그게 곧 내가 찾던 일이야. 낯선 섬에서 스몰잡을 시작한 리무 씨의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리무 씨는 시커먼 바다를 다시 건너고 있다. 망망대해에서 자신에게 맞는 대륙을 찾아 돛을 올리고 바람의 힘을 빌리면서 말이다.

'더 나은 대륙을 향해 바람이 불거야. 반드시.'

리무 씨는 이번 모험에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를 능가하는 결기를 보였다.

리무 씨가 탄 배엔 앞으로 짊어질 짐들로 가득했다. 모험을 시작한 리무 씨는 지난 과거에 표류하고 이런저런 섬에 정착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내가 원하는 섬으로 가는 길은 분명 거칠고 힘들겠지만, 굶어 죽을 일은 절대 없어. 모험은 생각보다 쉽게 망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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