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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스 Feb 11. 2022

캐나다 속 나만의 작은 아지트

Life in Canada

아지트는 러시아어의 агитпункт에서 유래했으며, 구소련에 있었던 대민 사상교육과 선동을 담당하는 교육센터를 가리키는 단어다. 비밀결사나 공작원들이 비밀 작전 수행을 위해 작전 지역 내에 마련한 소규모 접선 장소를 일컫는다. 하지만 현대에는 일반인들이 개인적으로 즐겨 찾거나 자주 머무르는 장소를 은유적으로 아지트라 부리고 한다.


어디에 길게 머물 때마다 아지트를 만들었다. 워킹 홀리데이로 있었던 휘슬러에서도, 지금 살고 있는 스쿼미시에서도, 27년 내 고향인 인천에서도 그렇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잠시 몸을 숨기고는 그곳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자전거를 타다가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에 살았었다. 아지트를 만들려면 이 말의 어원대로 폐쇄된 공간이 주를 이루어야 하지만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다가 들어가면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적당히 폐쇄적이면서 조금은 탁 트인 풍경이 있으면 좋겠는 곳을 원했다. 참으로 깐깐하다.


현재 살고 있는 곳에는 딱 이런 곳이 있었다. 2만 명이 채 안 되는 마을이다 보니 탁 트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곳에 앉아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을 느낄 수 있었고, 떨어지는 석양에 지나간 후회들을 놓아줄 수 있었다. 눈이 와서 자전거를 타기 힘들었을 때는 쉬는 날마다 갔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지트 속 밴치


사진 속 밴치는 언제나 순간을 살게 해 준다. 눈과 비가 많이 오는 겨울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사진 속에 있는 밴치가 스쿼미시 속 아지트이다. 전방이 탁 트여 아지트라는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저곳에 앉아있으면 따뜻한 낙관이 불었다. 모든 걱정들이 잘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최근 삼촌이 돌아가셨다. 삼촌을 상실했다는 슬픔과 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답답함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쉬는 날 걷다 저 밴치로 가서 앉았다. 마침 풍경은 아름다움을 뽐내듯 붉은 석양과 적절한 하늘 그리고 붉그스름한 구름이었다. 앉아서 쌓온 맥주 캔을 한 잔 먹노라면 이상하게 따뜻했다. 풍경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밴치에 앉아 바라본 풍경


이런 곳 하나쯤은 주변에 있으면 좋다. 혼자여도 위로가 되는 곳. 걱정과 불안이 휘몰아처도 아지트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말이다. 현실을 잠시 못 본채 하며 흘러가는 공백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


스쿼미시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눈보다는 비, 구름 낀 날보다는 화창한 날씨들을 기상 캐스터는 예측하고 있다. 나는 이곳이 좋아지고 있다. 스쿼미시의 추위와 햇살, 스쿼미시의 익명성. 내가 장발이 되어도 이곳에서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의 장점은 나는 그곳에서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꺼냈다. 뒷바퀴 타이어 튜브에 구멍 난 것을 수리했다. 체인에 기름을 적절하게 칠했고 이곳저곳에 쌓인 먼지들을 닦아냈다. 돌아오는 휴무엔 자전거를 타고 아지트에 가봐야겠다. 그리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손에 쥐고 있고 고민하는 것들을 놓아주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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