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n Canada
세 번째의 낮. 이곳에 머무는 마지막 낮이다. 오늘은 옵션투어를 하는 날. 혜성이는 스노 모빌을 신청했고, 보라는 신청하지 않았다. 단비는 야생동물투어만 신청했고 나는 야생동물투어 및 온천을 신청했다. 보라는 동생인 혜성이와 같은 방향이었고, 나와 단비는 야생 동물 투어를 위한 버스에 올라탔다. 두 옵션 투어의 시작 시간은 각각 달랐다.
야생 동물을 보러 가는 길을 위해 호텔 로비로 나왔다. 밴이 아닌 다른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안내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는 일본인 여성 한 분과 미국인 커플 그리고 남미 부부가 있었다. 국적은 모르지만 스페인어가 가능한 가이드가 남미 부부에게 붙었다. 우린 버스로 호텔에서부터 30분가량 이동을 했고 눈으로 덮인 하얀 대지를 만날 수 있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단비와 대화를 나눴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한국어로 이야기한 적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불필요한 말은 필터로 걸렀다. 현재 본인의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각자의 과거로 향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제 시제로 쓰이던 화법이 과거시제로 바뀌었다. 약간의 나이차도 있었고, 한국에서 사는 지역도 달랐다. 신선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과 대답들. 앞으로 곱씹을만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어느새 야생동물투어를 하는 곳에 도착했다. 드넓은 야생에 펜스를 쳐놓은 느낌이다. 스케일이 컸다. 우린 버스를 이동하면서 야생동물들을 봤다. 그곳에서 다양한 동물들을 만났다. 무스, 산양, 엘크, 붉은여우 등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동물들이었다. 이곳은 야생 동물 보호소 같았다.
우리가 봤던 동물들 중 구조된 동물들이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스. 무스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수컷인 이 친구는 야생에서 구조됐다고 한다. 큰 우리 안에 갇힌 무스는 짧은 거리를 반복해서 왔다 갔다를 했다.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무스는 반대편 펜스로 가다 막히면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가이드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무스는 같은 곳을 반복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무스의 눈망울은 흑구슬 같았다.
야생 동물 투어가 끝났다. 야생 동물 투어만 신청했던 단비는 타고 왔던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나와 미국인 커플만 온천을 신청했다.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탕들이 있었고, 실내에는 사우나가 있었다.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면 젖은 머리가 언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있었던 날은 영하 17도 정도였다. 얼진 않았지만 꽤나 딱딱해졌다. 얼기 직전이었다.
야외에서 뜨거운 온천물에서 몸을 지졌다. 앞에는 설산이 보였고, 눈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스라이 연기를 내뿜는 온천이었다. 몸은 따뜻했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앞뒤가 맞지 않는 곳에서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혼자 있으니 그간 내 머릿속에 쌓였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밀린 생각들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여행은 한 사람의 삶을 수리하는 기간이다.
쉽게 대답이 나올만한 질문들은 아니었다. 고개를 젓다 하늘을 바라봤다. 마른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때렸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들이 명확해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은 이성을 부추겼다. 그렇게 써늘한 온천은 지친 내게 숨 쉴 틈을 마련해 주었다.
다른 탕으로 옮겼다. 그곳엔 같이 왔던 미국인 커플이 있었다. 이름은 에두아르도와 마리나. 서로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마리나는 한국에 대해 꽤 알고 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해 부족한 영어로 말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듣고 찰떡같은 영어로 남자친구인 에두아르도에게 설명을 해줬다. 예를 들면 한국식 나이. 미국과 캐나다는 없는 나이 계산법이기에 에두아르도는 신기해했다.
마리아가 한국 문화에 잘 알았던 이유는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고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 <부산행> 등 좀비 관련 드라마뿐만 아니라 최근엔 <피지컬: 100>을 봤다고 했다. 아직 안 봤다고 대답한 나에게 추천해 줬다. 미국인이 한국인에게 한국 넷플릭스를 추천하는 순간이었다. 국가에 대한 호기심은 개인의 친근함으로 변했고, 어제까지 몰랐던 우리는 그렇게 같은 여행자가 되었다. 역시 문화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였다.
오늘 세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다. 나의 영어는 직관적이었고, 한국어는 섬세했다.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나니 문득 여행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길고 긴 삶에서 그저 찰나처럼 스쳐가는 하루겠지만 나에게 오늘은 새로운 환희를 얻기 충분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