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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하루 끝 위로, 치맥

동해안 자전거 국토 종주

by 림스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달렸다.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은 늘 치맥이었다. 기다리는 치맥을 위해 달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 여름, 따가운 햇살 아래를 열심히 달리고 달려 하루 끝에 마시는 맥주는 행복이었다. 우린 어느 때와 비슷하듯 치맥을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호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삼성 중공업. 또래에 비해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군 전역을 하고 나서도 다니던 직장으로 복직해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 속에서 오는 무력감이 대호를 휘감았다. 패턴화 되어 있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 정체되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이곳을 나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가도, 이 뻐근한 일상이 주는 안정감도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지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선택한 몇몇 선배들에게 부러움과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30대 전에 나와야 할 텐데... 진짜 퇴사가 꿈이다. 근데 함부로 선택을 못하겠어. 지금 이 상황에선" 대호가 말했다. 이어 준섭은


"야야,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코시국에 아무것도 안 돼. 일단 붙잡고 있어. 엄청난 아이디어로 준비하지 않는 이상 힘들 거야"


"알지. 근데 뭔가 답답해"

"백수들 앞에서 배부른 소리 하네. 너 일하는 곳에 자리 없냐? 바로 내려가는 건데..."

"여긴 아니다... 애들아... 더 좋은 곳 가야지.."

"후.."


역시 인간은 서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탐내는 존재였다. 퇴사를 꿈꾸는 자와 입사를 원하는 자들의 대화였다. 대호는 기계공고를 나와서 전국대회에 입상해 삼성중공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훗날 술을 마시며 그날을 이야기해주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을 같이 보여주곤 했었다. 힘들 때마다 대호는 취업을 해 친구들에게 술과 밥을 사는 날을 상상하며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연락 온 대호에게 그때 당시 나는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어졌던 대호는 그날을 기점으로 다시 친해지게 되었다. 혈기왕성하고 무서울 것이 없던 이십 대 초반, 우린 많은 추억을 쌓았다.


어쩌면 대호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힘들게 대회 준비를 했던 그는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두 눈에 가득 찼었던 불꽃같은 열정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게 되자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등학교 때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나태와 안정감이 자리 잡았다.


"인생이 모르겠다" 맥주가 얼큰하게 들어가자 대호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대화를 시작했다. 이어 준섭은 "그러게. 지금 준비하는 것이, 걸어가는 이 길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해야 하는 것들을 또 내일도 해야 하고,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해서 잘 되면 좋은데, 안될 경우는 상상하기도 싫다"


"잘 돼도 문제야,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 학자금 대출 갚아야지, 만약 결혼할 수 있다면 결혼도 해야지, 집도 사야지, 아이까지 낳으면 어휴...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가 평범함이라는 것이야. 평범한 삶이 이렇게 어려울지는 몰랐어. 반대로 널리고 널린 수많은 실패담은... 어휴..."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한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고, 우린 멍하니 TV를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마른 웃음을 내던 우린 아무 말 없이 그저 맥주만 마셨다. 우리가 만난 지 햇수로 14년 차.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지긋지긋하지만 가장 많이 서로의 속이야기를 아는 친구들이었다. 이들과 있을 때 침묵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다 보니 침묵이 어색한 상대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들과 있을 때 가끔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맥주만 마실 때가 있었다.


우린 내일 일정을 말하고 잠에 들었다. 답이 없는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이야기함으로써 서로가 위안이 되는 기분을 품은 채 잠들었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린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 즐겼던 치맥에는 꽤 짙은 여운이 남았었다.


내일 또 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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