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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May 27. 2023

목걸이 사원증의 위력

클라라주미강 연주 타이스 명상곡 Meditation

지난주부터 거의 매일 출근해서 시험 감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큰 딸은 GCSE를 치르고 있다. 나는 4주 내내 non-epilepsy(비간질성 발작)이 있는 학생 한 명의 시험을 1:1로 감독하고 가끔은 A-LEVEL 시험을 감독하기도 한다.


평소와 같이 담당 학생의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시험 시작 20분 전에 옆 학교(담장도 없이 두 개의 세컨더리가 붙어있다)에 다니고 있는 큰딸에게 문자메제기가 왔다. 아랫배가 뭉치는 느낌이 나는 게 너무 아프다고 진통제를 가져다 달라는 게 아닌가... 시험 스트레스로 생리도 불순해지고 그로 인해 아랫배도 가끔 뭉치듯이 많이 아프다고 호소하긴 했었는데 하필 시험 보는 오늘 아침 또 배가 말썽을 부렸다. 아침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30분도 안되어서 그런 문자가 온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 진통제 달라고 하라고 하니 학교에서는 절대 학생에게 약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당장 약을 사러 갈 시간도 없고 난감해하며 가방을 뒤지는데 다행히 내 가방 작은 주머니에 진통제 두 알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옆방에 있는 감독관에게 옆 학교에 잠깐 다녀올 테니 내 학생이 오면 밖에서 대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정신없이 딸아이 학교로 뛰어갔다. 학교 리셉션에 가니 딸아이가 배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얼른 다가가 약을 전해주니 구세주를 만난 듯이 얼굴이 펴졌다. 시험 볼 수 있냐고 물으니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리고 다시 뛰어서 시험 교실로 돌아왔다.


 영국사람들은 웬만해서 뛰지 않는다. 남편과 결혼하고 아주 한참있다가 안 사실은 아무리 급해도 남편은 절대 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뛰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영국 와서는 웬만해서는 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뛰지 않으면 딸아이가 시험장에 제시간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내가 담당한 학생의 시험을 제시간에 시작할 수 없게 되니 어쩔 수가 없이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다행인가. 딸아이 옆학교에서 일하니 급한 상황을 5분도 안 돼서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험을 못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


딸아이가 보는 시험과 내가 감독하는 시험이 같은 과목으로 둘 다 동시에 끝나서 딸아이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고 주차장에서 만났다. 차에 타자마자 걱정이 되어 배가 계속 아팠냐고 물으니 초반 30분 정도 아팠는데 시험은 그럭저럭 본 것 같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엄마, 근데 아까 엄마가 왔을 때, 집에서만 보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깜짝 놀랐어. 우리 엄마가 이렇게 예뻤나? 했어. 정말이야. 오늘따라 키도 안 작아 보이고. 신기하더라'


아침에 출근복장으로 같이 차를 타고 나와서, 같이 차에서 내려서, 각자의 학교로 가기 때문에 딸아이는 나의 출근 복장을 이미 봤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사원증을 목에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사원증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가 싶다. 시험 못 볼까 봐 노심초사하며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상황에서도 엄마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


딸아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때 첫 소풍도 해외 출장이 있어 따라가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엄마에게 들은 얘기로는 유일하게 부모가 한 명도 안 따라온 아이는 우리 아이뿐이었다고 했다. 혼자서 무리에서 떨어져서 김밥을 먹고 있길래 같이 먹자고 데려와서 먹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다.  그런데 정작 딸아이는 소풍을 갔다 와서도 소풍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었다. 학교 체육대회도 거의 가본 적이 없다. 한 번은 나 대신 직장 동료 둘이 점심시간에 딸아이 학교에 가서 아이와 점심을 같이 먹어준 적도 있다. 그래서 늘 직장 다니는 것이 딸아이에게 미안했는데 이제 많이 커서 가끔이라도 직장을 나가는 엄마가 더 커 보이고 예뻐 보인다고 하니 세월의 힘이 느껴졌다.


타이스 명상곡 Meditation

딸아이 바이올린 그레이드 7 연주곡인 타이스의 명상곡. 그레이드 시험 곡이 선정되자마자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라며 연습을 많이 해서 결국 만점을 받았다. 이 곡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오케스트라 협주곡 연주 후 앙코르곡으로 많이 연주하기도 한다. 딸아이가 이 곡을 연습할 때 클라라 주미강의 이 비디오를 많이 보고 따라 했었다. 언젠가 한국에 가면 딸아이와 꼭 클라라주미강의 연주회에 가보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6vB_hUP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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