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과 가운데 벽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 옆집 할머니 데프니.
올해로 86세이시다. 어머님과는 14살 차이가 난다.
어머님은 데프니를 엄마처럼, 언니처럼 기대고 의지한다.
그리고 데프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음식을 해서 나르기도 하고, 장을 대신 봐주기도 한다.
어머님이 무릎수술을 하셔서 잘 걷지 못했을 때 데프니가 간단한 장과 토요일마다 신문을 대신 사서 날라다 주었다. 지금은 둘이서 격주로 토요일마다 신문(토요일에 발행되는 일주일치 tv프로그램과 각종 소식을 실은 두께나 내용으로 봐도 주간지나 마찬가지이다) 담당을 한다고 한다.
파스텔톤 벽이 데프니의 집이고, 거무죽죽한 베이지 벽이 어머님의 집이다. 이층 창문 두 개는 각각 그녀들의 침실이다.
데프니는 어머님 보다 나이가 많지만 어머님 보다 활동적이며 건강하다. 그야말로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 허리, 무릎 어디 하나 아픈 데가 없다. 서있는 자세도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 꼿꼿하다. 남들은 잔디와 꽃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바라보며 즐기는 정원을 다 뒤집어엎어 야채를 길러먹는다. 해마다 농산물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어느 해인가는 호박을 잘 길러서 상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작년 여름 그녀가 땡볕에서 일하다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한동안 집에서 원기를 회복하느라 바깥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때 어머님은 데프니에게 '당신 나이에 그렇게 오래 뙤약볕에 나가 일을 할게 뭐냐'라고... 쉬엄쉬엄하라고 싫은 소리를 하셨다.
근데 올해도 데프니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작년의 어지럼증을 소환시켰다. 그래서 어머님은 30분 정도 일하고는 집에 들어와 쉬었다가 다시 또 나가라고 데프니를 타일렀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데프니는 지금 알람을 설정해 놓고 정원일을 한다. 30분이 되면 알람이 울리고 그러면 바로 실내로 들어와 쉬었다가 다시 나간다.
동네 자선단체에서 운영하는 채러티샵에서 일주일에 한 번 자원봉사도 한다.
어머님에게는 손주들이 5명이 있는데 그 손주들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늘 챙겨주신다. 손수 만든 입체카드에 5파운드 지폐를 넣어서 보내주신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그 돈으로 무엇 무엇을 했다고 감사카드를 보낸다.
어머님은 가끔 데프니와 나눈 대화를 나에게 이야기해 줄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둘이서 몇 년 동안 모은 은행 거래내역서를 언제 폐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고 했다. 영국은 온라인뱅킹이 생기기 전에 은행에서 한 달에 한번 각 집으로 은행거래내역서를 보냈었다. 지금도 원하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다. 어머님과 데프니는 아직 까지도 우편으로 받아보고 있다. 둘은 여전히 인터넷뱅킹을 거부하고 있고, 되도록이면 현금을 쓰려고 하고 있다. 데프니의 다락방에는 남편이 살아계실 때 받아봤던 거래내역서까지 모조리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30년도 더 된 내역서를 머리에 이고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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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두 여인이 각자 머리 위 다락방에 이고 사는 몇십 년 된 은행거래내역서를 언제 버려야 하는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까지 것만 보관하면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매우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난 안다. 그녀들은 결코 그 어떤 종이조가리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얼마 전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동안 한 짓이 한심한 보수당이 표를 많이 잃을 위기였다. 어머님 집에 갔는데 데프니의 앞 유리창에 '자유민주독립당 지지!'라고 직접 종이에 써서 붙인 것이 보였다. 순간 남편과 나는 동시에 'Typical Dephne!(역시 데프니 다워!)를 외쳤다.
쓰레기차가 오는 날 혹시라도 비운 쓰레기통을 제대로 세워놓지 않고 던져놓으면 바로 나가서 불같이 화를 내며 카운슬 사무실에 민원을 넣을 것이라고 훈계를 하는 것도 데프니이다.
어머님의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 동네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산다. 그래서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우리가 있는 동네에 방 두 개짜리 단독으로 이사 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드렸었다. 도보로 작은 딸네와 우리 집을 자주 오갈 수 있고 작은 쇼핑센터나마 가까이 있는 이곳이 어머님에게는 더 살기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데프니가 살아있는 한 본인은 지금 집을 못 떠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님이 데프니에게 얼마나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와 나이가 많은 그녀를 돌봐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통뼈 테프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