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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Jul 14. 2023

Romina(로미나)

불안증 극복기

올 5월 공식 시험기간에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나만큼 작은 체구에 아주 마른, 영국인 같지 않은 말투의 로미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목소리도 작은 편으로 왠지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맘이 들게 만들었다.


같은 공간에서 감독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지를 픽업하거나 시험을 마무리할 때 강당에서 몇 번 보고 인사만 주고받았었다.


지난주 디자인과에서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하는데 일손이 필요하다고 모든 시험감독관들에게 도움 요청 있었다. 그리고 당일 로미나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명이 일을 돕게 되었다. 그날의 임무는 새로운 요리실습실의 집기 언박싱과 아이템 별로 각각 제자리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우리 집 부엌보다도 더 없는 것 없이 모두 갖춘 너무나 완벽한 요리 실습실에 감탄하며 딸아이가 여기서 요리실습을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로미나와 나는 같은 조로 움직였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인이었다. 로미나는 고기단백질을 소화할 수 없어 채식을 하고 요리를 좋아해서 자기는 그 실습실에서 하루종일 있으라고 해도 있을 수 있다며 좋아했다. 가족들은 모두 이탈리아에 있고 남편과 남편의 딸과 함께 셋이서 학교 근처에 산다고 했다.


시험감독관 자리에 작년 나와 같은 시기에 지원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 사무실에서 6개월간 무보수로 일을 배웠고 기회가 되면 학교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근처 초등학교에 보조교사 자리에 지원을 했었는데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난 어째 학교에서 6개월이란 긴 기간 동안 무보수로 일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다가 사무실은 늘 일손이 부족하니 로미나의 착한 성격을 학교에서 이용한 건 아닌지... 괜히 불손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다른 감독관인 헬렌과 의상디자인교실과 목공디자인교실의 세팅을 위해 추가로 지원해서 일을 하다가 로미나 이야기를 했다. 헬렌 말로는 로미나가 작년에 시험감독관을 지원했는데 워낙 불안증(anxiety)이 심해서 시험 매니저가 일단 채용을 보류하고 학교의 이 부서 저 부서 다녀보며 학교 분위기와 일을 익히고 나서 천천히 감독일부터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 이번 5월에 어느 정도 로미나가 학교에서의 일에 안정감을 얻은 것 같아 시험에 투입되었다고 했고 걱정과는 달리 아주 잘 해냈다고 했다.


나의 불손한 생각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남의 불안을 껴안고 도와주고 이끌어 준 시험매니저와 학교의 배려가 감동적이었다. 로미나는 이제 학교 사무실에 자리가 나면 지원해보고 싶다고 했다. 로미나가 성공적으로 학교에서 일자리를 얻기를 나도 온 마음으로 나마 응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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