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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23. 2023

글씨 못써도 괜찮아!

노트북으로 보는 시험

시험 기간에 별도의 교실이 준비된다.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글씨를 못쓰는 학생들을 위한 교실로 책상에 노트북이 하나씩 준비된다. 답안을 타이핑할 수 있는 워드 양식에 시험 과목과 학생 이름을 적고 답을 작성하여 정해진 폴더에 저장하면 채점 담당 선생님에게 공유되어 채점을 하게 된다. 보통 10~15명 정도가 노트북으로 시험을 본다. 이것 또한 시험 담당자로서는 매우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전에 몇 개의 노트북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전날 노트북을 셋업하고 충분히 충전을 시켜 놓아야 하며, 시험이 완료되면 바로 폴더까지 확인해야 하고 점심시간에 학생이 노트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교실을 잠가놓는다던가 아님 시험매니저 사무실에 수거를 해와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글씨는 시험에서 점수를 얻으려면 노력해서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감독을 하는 케이티가 내 옆방에서 1:1 감독을 할 때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둘 다 애를 키우는 엄마들이니 아이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케이티는 아이가 셋인데 둘은 이미 대학에 갔다고 했다. 원래는 딸 셋을 낳았는데 큰딸이 트랜스해서 아들이 한 명 생겼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순간 그녀가 멋져 보였다. 그 아들이 글씨를 너무 못써서 교정하는 도구란 도구는 다 써봐도 도저히 고쳐지질 않아서 결국 시험을 노트북으로 봤다고 했다. 거기서 깨달았다. 그냥 개인의 나태함으로 글씨를 못 쓰는 경우도 있지만 손가락 구조상 못 쓰는 학생들도 있다는 것을. 이렇게 나는 아직도 표면적인 것만 보고 쉽게 평가를 해버리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내가 보는 것 뒤에 어떠한 노력과 사연이 있을지는 간과한 채 말이다.


 커버수업 공강시간이 생겼는데 그날 학교의 사무실이 바쁘니 가서 일 손을 좀 도와주라고 매니저가 나를 사무실로 보냈다. 아침에 지각하는 학생들은 교실로 바로 갈 수 없고 사무실에서 지각했다는 쪽지를 받아 수업교사에게 제출하게 되어있다. 또 지각 명단에 본인의 이름과 소속 반을 적게 되어있다. 그러면 담당 직원은 나중에 그 리스트를 가지고 출석 시스템에 선생님들이 결석으로 처리한 것을 지각으로 바꿔 입력하게 되어있다. 그날은 내가 그 일을 담당했는데... 세상에나... 학생들의 글씨가 정말이지 너무 알아보기 힘들었다. 자기 이름을 수도 없이 써봤을 텐데 이름 하나 남들이 바로 알아보게 쓰는 게 그리 힘든 일일까... 특히 나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도저히 못 알아보는 것은 따로 체크해서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아무래도 외국인이라 더 못 알아보는 것도 있을 거라고 말하니... 아니라며 본인들도 글씨 잘 알아보는 학원을 따로 다녀야 하나 고민할 정도라고 했다.


앞으로는 노트북으로 시험 보는 학생들이 더 늘면 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가 예전에 나에게 화를 냈던 일이 기억났다. 20대 중반쯤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엄마가 나에게 지인 자녀 결혼식 축의금 넣을 봉투에 축결혼과 엄마 이름을 좀 적으라고 흰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이런 일은 보통 글씨라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오빠나 언니를 시킨다. 그런데 그날은 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부탁을 하였고, 난 후딱 써서 엄마에게 봉투를 드렸다. 바로 생각지도 않았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가 이러려고 너를 대학 교육까지 시켰는지 알아! 세상에 대학까지 나온 애 글씨가 이게 뭐니. 창피해서 이 봉투를 어디에 써먹겠어!' 그러곤 결국 그 봉투는 찢어 버리셨다. 나도 너무 당황해서 빈 봉투 하나를 다시 꺼내어 최선을 다해 써보았으나 내가 봐도 창피할 정도였지만 엄마에게도 선택권이 없으니 여전히 화를 내시며 그걸 가지고 나가셨다.  


한국에 있을 때 남편에게 장을 보라고 한국어로 쇼핑리스트를 적어놓고 출근한 적이 있다. 남편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했다. 읽을 수 있는 글자가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결국 전화로 다시 불러주었다. 나도 정말 이렇게 글씨를 못 쓴다. 이제 딸들의 구박을 종종 듣는다. 엄마 글씨는 알아볼 수가 없다고...... 그럼 남편은 신이 나서 거든다. 1:1 감독실은 앉아서 감독을 하는데 빈 종이를 꺼내놓고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침착하게 잘 써보려고 연습하기도 하고, 쇼핑리스트 같은 쉽게 휘갈겨 쓰기 쉬운 것도 정성을 다해 써보려고 노력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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