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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17. 2023

각자 나름의 이유





내가 일하는 학교는 등록된 시험감독관이 약 25여 명 된다. 매일 있는 일도 아니고 급여도 최저임금이다 보니 돈을 벌기 위해 시험감독관을 하는 사람은 없다. 또 이 일에만 매여 있는 사람도 없다.


같이 일하는 감독관들 중에 리처드(60대 초반)는 이른 퇴직을 하고 시험 감독을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3월에 혼자만의 스키여행을 위해 이 일을 한다. 얼마 전 미술 실기 감독을 같이 했는데, 3월에 프랑스로 스키 타러 간다고 말하면서 얼굴에서 빛이 났다.  부럽다고 하니, 너도 언젠가 너만을 위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트레버(70대 초반)는 전직 경찰관이었고 은퇴 후 시간 될 때마다 이 일을 한다고 한다.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뭔가 잘 안 돌아가면 다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남동생이 한국 현대에서 일하는데 한국 음식 맛있다고 자랑을 많이 한다고 했다. 감독일을 나갈 때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데 와이프가 항상 잔소리를 한다고 한다. '얼굴도 무섭게 생겨가지고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을 애들 겁주려고 양복은 왜 입고 가' 하지만 트레버는 자기는 old school 스타일이라 일을 할 때는 제복이 아니면 양복을 입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타박스나 코스타 중에 자긴 코스타커피숍이 더 좋단다. 단순히 코스타커피숍은 티를 주문하면 티팟에 나온다는 이유에서이다.


헬렌(50대 중반)은 춤추는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가이다. 주말엔 주로 사진을 찍고 주중에 시험이 있을때는 감독일을 한다. 학교 근처가 집이고 딸이 이 학교를 다녀서 이 일을 시작했고, 집에 두고 온 개 때문에 종일 타임은 못한다. 요일별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 재킷을 입는다. 진파랑, 진녹색, 검은색, 보라색, 빨간색.


케이티(50대 중반)는 막내딸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걸스카우트 자원봉사도 같이 하고 있다. 키가 아주 커서 같이 얘기할 땐 목이 아프다.


맨디(60대 초반)는 전직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일찍 퇴직하고 이 일을 시작했는데, 책임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 일이 좋다고 했다. 내 큰 딸이 다니는 옆 학교에서도 시험감독관일을 한다.


로드니는 감독관 중에 나이가 제일 많다. 파이프 회사에서 설계를 했었다고 했다. 나만 보면 북한얘기를 물어본다. BBC에서 북한에 대해 비교적 많은 프로그램들이 방송되었고, 그런 것을 본 영국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한국과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만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로드니는 그래도 양반이다. 어떤 영국 사람들은 나에게 North에서 왔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만약 내가 내전 중에 있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났다면 정확히 그들이 어느 쪽에서 왔는지 알 수 있을까? 큰 딸은 학교에서 아직도 그렇게 물어보는 학생이 있다며 무식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그래서 딸에게도 영국사람들이 아주 멀리 있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바로 수긍을 했다.


로레인은 6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데 옷을 아주 잘 입는다. 꽃무늬 롱치마, 크림색 가죽재킷에 캔버스 운동화를 신고 온날 그녀의 패션감각에 반해버렸다. 앞으로 그녀가 선보일 패션이 매우 궁금하다. 


모두가 이 일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끔은 아침에 목적을 가지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손녀 같고 딸 같은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 좋고,

많지 않은 돈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또는 가족들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해 볼 수도 있고,


나는 영국에 와서 둘째 딸이 초등학교를 다니는 4년 내내 아이를 픽업 가서 운동장에 서 있으면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거의 나는 혼자였던 것 같다. 그것이 그리 불편하거나 싫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운동장이라는 큰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러다가 교실문이 열리고 딸이 두 팔 벌려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아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잠시나마 느꼈던 외로움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영국 시댁식구들이나 남편의 친구가족들을 제외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야 사람들과 대화를 제대로 하는 것 같았다. 아이 교육문제, 연로하신 부모님 돌보는 문제, 여행이야기, TV 프로그램, 감독하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이나 조언 등등에 대해 부담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영국엔 자원봉사자들이 참 많다. 대표적으로, National Trust는 영국에서 보존 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유산을 관리 보존하는 시민단체이다. 기부금과 회원비로 운영이 되며 5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이 된다. 문화해설에서부터, 다양한 재능기부, 건물관리, 정원관리, 주차안내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분야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일하고 있다.


시어머니 이웃인 데프니 할머니는 90이 다 되어간다. 일주일에 한 번 시내 채러티가게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남편의 친구 어머니도 9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시내 옥스팜이라는 채러티샵에서 토요일마다 자원봉사를 한다. 시아버님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조류서식지보호구역에서 공원관리 자원봉사를 하셨었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도, 남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각자의 삶에 많은 부분을 채워주는 소중한 일들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것 같고, 영국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일이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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