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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Mar 27. 2021

할머니를 땅에 묻던 날, 내 할아버지는 춤을 추었다.

함 받는 날 같던 장례식

장구, 북, 징, 꽹과리를 든 도깨비들이 흥겹게 춤을 춘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더니 상모를 돌린다. 등원시간을 앞둔 다섯 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교육방송을 보며 함께 몸을 들썩이고 있는데, 뜬금 없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지? 내 무의식에 한국인의 얼이 이토록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었던가? 내가 이 사물놀이 가락을 언제 그렇게 들어봤다고?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땅에 묻던 그 날의 장면이. 


장례란, 적어도 내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다 돌아가신 그 지역의 장례란  무겁고 어둡고 슬프게만 진행되지 않는다. 상여를 메고 힘겹게 산을 올라 터를 파고, 고인을 땅에 묻고, 땅을 다지는 회방아를 찧는 과정에 무슨 흥겨움이 있겠냐 싶겠지만, 한참을 다지고 또 다져야 하기에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교대도 해 가며 요란하게 찧는다. 망자를 보낸 가족들도 울고 서 있지 않는다. 새끼줄에 돈을 꽂아가며, 장례 치러주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주고 받으며 달래가며 정신 없이 일을 치른다. 마치 결혼식을 앞두고 함을 받는 그 날의 분위기와도 비슷하다.


내 할아버지는 중풍에 걸려 꼼짝 없이 누워 계신 할머니 곁을 10년 가까이 지켰다. 본래 뇌졸중을 한 번 앓으셨던 할머니는 시동생, 즉 할아버지 남동생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으셨고 결국 병이 도져 전신 마비가 왔다. 작은할아버지 장례식날, 몸이 좋지 않아 집에 혼자 계셨던 할머니가 걱정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보냈다. 나름대로 유심히 말투가 어눌하진 않으신지, 몸이 잘 움직이시는지 살펴보았음에도 긴가민가했던, 괜찮다며 등 떠미는 할머니의 말에 집으로 향했던 그 날을 나는 평생 후회한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셨고, 그 길로 누워 10년 가까이 산 송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 인생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딱 하루 고른다면 나는 지체 없이 그 날을 고를 것이다.


"사람 목숨 참 질기다 했다. 어찌나 힘들어하는지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했어." 누가 감히 그 말을 너무하다 할까. 장례를 치러주는 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랫 동안 한 동네에 사신 친 동생같은 분들이었다. "형님 죽었을때도 내가 잘 치러줄게~" 실 없는 농담도 하고, 한 대 쥐어박히기도 하는 사이였다. 회방아가 고될수록 가락은 점점 고조되고, 약주를 드시던 할아버지는 일어나 어깨를 들썩이며 춤도 추었다. 고된 삶을 버텨 낸 할머니를 초라하지 않게, 원하는 만큼 잘 갖춰 보내줄 수 있어 안도하는 씁쓸함과 이제는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실감하는 담담한 두려움, 나이가 들어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형제자매들과 자식들 걱정이 그 어깨에, 팔에, 손에 얹혀 있는 듯 했다.


내 아이가 지금 다섯 살인데, 나는 다섯 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나이 때의 나로 돌아가 다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이와 함께 있다가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내 기억에 할아버지는 나이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사신 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를 곧 자신의 정체성처럼 여기기 때문에 어릴 땐 아이의 삶을, 부모가 되면 부모의 삶을, 노인이 되면 노인의 삶을 산다. 하지만 내 할아버지에 대해 누군가의 아버지, 노인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이를 부정하고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완벽히 지켜 내면서도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마지막까지 조금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호랑이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왜 생전에 할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지 못했는지 너무나 후회했다. 기껏해야  어릴 때 호기심에 물어봤던 팔뚝의 나비 문신은 군대에서 했다는 것, 군인이었을 때 하야시로 불렸었다는 것 정도만 직접 들었을 뿐이다. 피난을 와서 홀어머니와 밑으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건사하며 농사를 일구고 '딸기집'하면 동네 사람 누구나 알았을 만큼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된 개척과 도전의 삶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립다. 무심히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다가 내가 말을 걸면 마치 지금 내가 내 아이를 바라보는 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그 모습이 불쑥 불쑥 떠오른다. 고생스러웠던 삶이지만, 결국 공허하게 끝나버린 삶이지만 내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조금이나마 기뻐하시지 않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 내 마음 속 숙제 같았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오늘 뜻밖의 계기로 풀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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