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썩는 날에는 짠 것이 당긴다.
한동안 우울감과 압박감에 시달려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다. 사실 육아를 하면서 신경정신과를 찾아 약을 처방받는 엄마들이 적지 않다. 내 주변에도 몇 명이 있는데, 아이가 둘 이상이면 일단 맨정신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것 같다. 아이에게 너무나 화를 많이 내게 되어서, 집안일과 육아에 지쳐 쓰러지듯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러다 죽겠다 싶어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렸다고들 한다.
나의 경우는 최근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다. 아이의 알레르기 경구유발 검사를 앞두고 극도로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였고, 동시에 아이가 진학할 학교들을 알아보러 다니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아 한숨을 너무 많이 쉬고 과호흡을 하는 증상을 보여 소아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한의원 등 네다섯개의 병원을 찾아다녀야 했다. 모든 의사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심리적인 문제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속 시원히 내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 이해가 안되더라도 힘이 되는 말을 해줄 사람을 떠올려 보려 애썼는데 쉽지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나 아이가 없는 친구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 하더라도 알레르기 문제나 일반 초등학교가 아닌 다른 진로에 대한 고민을 공감 받기는 어려웠다. 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나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은 다른 이들의 기분도 다운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에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혼자 끙끙 앓고 고민하다 보니 말 그대로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짠 과자가 그렇게 당겼다. 부패하지 말라고 소금을 치라는 내 몸의 신호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결국 가장 힘든 것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이건 나 혼자 고민하고 답을 내야 할 문제야"라는 내 생각이었다.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니 아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계정이 추천 계정으로 뜨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 사진에, 길게 적은 사연에 꼭 좋아요 버튼을 눌러준다. 그것이 그 엄마의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픈 아이 키우는 엄마의 마음도 너무 아플텐데, 굳이 거기다 댓글로 "아이의 아픔을 이슈화시켜서 관심받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참나, 왜 굳이 저런 말을 하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놀리는 수고를 할까. 아이가 아파서 남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질투라도 나는 것일까.
그리고 '관심' 받고 싶어하는 것이 도대체 뭐 어떻다는 말인지. 우리 아이가 가진 알레르기는 너무나 흔하지만 아나필락시스까지 가는 경우는 흔치가 않다 보니 주위의 공감을 사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나는 따로 알레르기 관련 계정을 하나 더 파서 아이의 상태를 기록하기도 하고, 비슷한 상황의 엄마들의 조언을 받기도 한다. 이런 관심과 교류가 없었다면 내 마음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썩어있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아프다, 남들에겐 없는 알레르기를 가졌다는 '사실'보다 엄마를 더 힘들게 만드는건 누구도 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고립감'이다. 막막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가 힘내라고, 지켜보고 있다고, 응원하고 있다고 달아주는 댓글 하나 하나에 지탱해 또 하루를 버틸 힘을 얻는데, 그것마저 질투가 나서 비꼬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마음이 외로운걸까.
나는 지금 약을 먹지 않고 있다. 내가 약을 먹는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약을 먹으면서 실제로 약이 효과가 너무 좋아서 내가 의존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워졌다. 그래서 아, 내가 약을 먹으면서 열심히 사느니 약을 끊고 '에라이, 놀아버리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내가 엄마로서도, 또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컸다. 그래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일을 하려고 앉으면 집중이 되지 않아 한참이고 딴짓을 해가며 죄책감만 더 쌓았다. 아이와도 온전히 즐겁게 놀아주지 못해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놀아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나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뒤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그리고 코미디 영화들을 찾아내서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그 시간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웃긴 영화만 보기'로 정했다. 영화에 몰입해서 그냥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원한 아이에게도 좀 더 너그럽게 품을 내어줄 수 있었다.
프리랜서인 나는 원래 일이 줄어들면 전전긍긍하고, 일을 더 늘릴 방법을 고민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젠 "이 일도 10년을 했으니 좀 쉬게 되더라도, 일이 끊어지게 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집착을 좀 놔 버리려고 노력하자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 놓아지긴 했다. 그래서 약을 먹지 않아도 나쁘지 않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요즘 일이 줄어든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주말에도 매일 약간은 일을 했는데, 이젠 주말은 아무 생각 없이 푹 쉴 수 있게 됐다. 그 동안 몰랐는데, 주말에 그 조금 하는 일도 나에겐 은근한 스트레스였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내가 죽기 전에 "아 그때 일 좀 더할걸"하고 후회할까? 아니면 "아 내가 좀 더 놀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할까. 결혼하고 난 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결혼 전에 좀 더 놀걸" "결혼 전에 여행 좀 더 많이 다닐걸"인 것을 보니,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클 것 같다. 그래서 난 당분간 놀아버리려고 한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컷 다 놀고 나면, 노는게 지겨워서 다시 일하고 싶어질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