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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집

귀신

by 글임

처갓집에 다녀왔다. 여즉 내게 ‘처’가 있다는 사실이 낯선 때가 있다. 여름이면 냉동실에 있는 25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찾으려고 짧은 손을 내밀던 철부지 아이가 덜컥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이 느껴진다. 거뭇한 수염자국이라던지, 뛰는 것보다 걷는 게 좋다던지, 음료수보단 따뜻한 차를 좋아한다던지, 서른 번 바뀐 년도가 남긴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나는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2001년이나 2025년이나,


다섯 살, 나는 항상 불을 켜고 잠들었다. 유독 어두운 걸 싫어했던 나는, 거진 매일 밤 내 이부자리를 두고 엄마와 아빠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느 여름밤에는 누나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하나코’라는 일본영화를 봤는데, 슬쩍 거실에 물을 마시러 나갔다가 봐 버린 장면에 오늘 밤은 불을 켜고 자면 안 되냐고 떼를 쓰기도 했다. ”하나님이 귀신 다 이겨!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목사이신 아버지는 나를 달랬다.


서른 살, 귀신보다는 난시가 두려워서 불을 끄고 잠들고, 아내와 함께 잠든다.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틀어본 하나코는 귀엽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삼촌, 귀신 나올까 봐 무서워요.“라는 동생에게 푸근한 향이 나는 향수를 뿌려주며, “이 냄새 맡으면서 자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어때, 벌써 편안하지?”라고 달래주기도 한다. 쓰다 보니 불을 켜고 자던 다섯 살의 꼬마가 더러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귀신 나올까 봐 무섭다던 그 아이는, 보통 향수 냄새를 몇 번이고 맡아가며 금세 잠든다. 그러나 어떤 날은, 다시 사무실을 찾아온다. 그날은 대게 누군가 보고 싶은 날이다. 언제 볼 수 있을는지, 언제 그 품에 안길는지, 언제 그 목소리를 들을지, 애먼 불안이 찾아오는 날이다. 방금까지 머리를 베고 누운 베개가 불편하고, 부드러웠던 잠옷이 몸에 결린다. 금세, 불 꺼진 방 안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 불안은 대게 무게가 무거워서, 누운 자리를 쉽사리 박차고 일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혹시나 이불을 들추면 뭔가 무서운 게 있는 건 아닐까, 발을 내밀고 자다가 누가 내 발을 잡는 건 아닐까,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집어삼킨다. 귀신이다. 외로움이라는 귀신, 불안이라는 귀신, 두려움이라는 귀신.


그래서, 한 밤에 두 번이나 사무실을 찾아오는 아이는 용감하다. 그 귀신을 물리치고(어쩌면 두 눈을 꼭 감고 모른척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어둡고 넓은 거실을 지나 작은 불빛이 있는 사무실로, 홀로 걸어왔으니 말이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는다. 때로 같이 그 아이의 침대로 걸어가고, 때로 그 옆에 눕는다. 이내 조용한 숨소리가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그럼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책상에 다시 앉는다.


비록 나는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은 아니지만, 귀신을 잡는 법을 안다. 손 잡고 있기, 안아주기, 옆에 누워있어 주기 따위이다. 아, 다음엔 그렇게 표현해볼까 싶다. ‘다정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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