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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집

해가 지고 나서 쓴 글

by 글임

다섯이나 되는 남자아이들을 다 재우고 나면, 나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사무실 의자에 오도카니 앉는다. 오늘 저녁에 사용한 식기들은 깨끗이 닦였는지, 가장 큰 아이가 내일 아침에 입고 갈 교복은 빨았는지, 내일 아침에 먹을 재료들은 잘 손질해 뒀는지, 몸은 퇴근이어도 머릿속은 하염없이 돌아간다. 문득, 양치를 안 한 게 생각난다.


해가 질 때까지 곡진히 아이들을 보살피다 보면, 정작 내 몸피는 챙기지 못하는 날이 잦다. 온통 눈이 제 높이보다 낮은 곳을 보고 있자니 생기는 일이다. 덕분에 퇴근을 하는 금요일 밤이면 아내는 내 수염을 보면서 웃는다. "수염 못 깎았구나!" 나는 괜히 무람해져 거울을 보곤 한바탕 웃는다. "완전 아저씨잖아!" 그러곤 아내 얼굴에 수염을 가져다 비빈다. 우하하!


어릴 적 아빠의 수염은 무지 따가웠다. 같은 털이라도 머리카락은 이렇게 부드러운데 수염은 끝이 날카롭게 자라기라도 하는 건지, 아빠가 나를 안고 수염을 문댈 때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니 괜히 볼이 따끔거린다.


막내였던 나는 어린 날 유독 잘 삐져서, 혼자 방에 들어가 누워 버리곤 했다. 으레 동생들이 그러듯, 손윗사람들의 장난에 쉬이 마음이 뾰족해졌다. 밥 먹을 때가 되면, 문고리를 열고 아빠가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셨다. "슈우우우우우 우웅 콰가가가가가" 미사일 효과음과 함께 파고드는 아빠의 손가락에 하지 말라고 삐죽 댔지만, 아빠 문을 닫고 나가면 이내 나도 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야 깨닫는다. 마음이 뾰족해져서 방문을 닫아버린 나는 동시에, 곧 아빠가 열어 주길 바랐다. 따끔한 수염을, 미사일 같은 손가락을 그리워했다.


내일 아침에는 볶음밥을 하려고 한다. 유독, 한 아이가 볶음밥을 그렇게 해 달라고, 볶음밥은 성빈 삼촌이 제일 맛있다며 너스레를 떤 탓이다. 내일은 그 애가 싫어하는 당근을 밥알만큼 작게 썰어 넣을 생각이다. '어디 이것도 한번 빼먹어 보시지.'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만 흘려보낸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른이 되는 것도 일종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른이 되어도 내 뾰족한 수염을 누군가에게 문대고, 미사일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옆구리에 찔러 넣는 어른이 되고 싶다. 닫은 문을 열고 들어가 한껏 가까워졌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그런 어른이 된 날 '와하하하' 웃는 그 소리가, 아버지를 닮았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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