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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집

냉침차

by 글임

#장면집

@geulim.b

“밖이 34도면, 오늘은 어제보다는 시원한 편인가?” 따위의 말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여름이다. ‘오늘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다.’라는 뉴스를 봤다. 앞으로 34도보다 더 시원한 여름이 없을 거라니, 아찔하다.


나는 이런 더위에 살아남기 위해 냉침차를 마신다. 주에 한 번에서 두 번은 냉침차를 만들어두는 편인데, 제법 다양한 찻잎으로 해보았더니 이제 나름대로 기준이 생긴 탓에 더 즐겨 마시고 있다.


찻잎을 냉침용 병에 담고 찬물을 채워 하루 정도 두면, 찻잎이 위 아래로 제 자리를 찾다 찻물이 만들어진다. 찻잎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별안간 차가운 물이 들이치는 게 낯설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땅에 심겨 자라날 때에도 뜨거운 볕에, 잎을 수확해 말릴 때에도 뜨거운 바람에 , 온 생애를 뜨겁게 지내다 대뜸 차가운 물을 만난 것이다. 차 잎장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놀래버려서 누구는 위로, 누구는 아래로 자리를 찾아간 게 아닐지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따뜻한 물에 풀어둔 찻잎은 금세 맡음직한 향을 머금는데, 차가운 물에 풀어둔 찻잎은 당최 잎이 적셔지기는 하는지, 찻물이 우러나오기는 하는지 의심이 앞선다. 얼른 찻물을 내놓으라고 스푼을 들고 몇 차례 휘저어 봐도 끄떡없다.


‘그래, 기왕 찬물에 담긴 거 얼음처럼 차가워져 보라’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다음 날 어느새 맑은 찻물이 만들어져 무람해진다. 희끄무레하던 수색이 어느새 풍성한 색을 띄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는 따뜻한 차와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다즐링이라는 홍차는 냉침해서 먹으면 더 풍부한 향이 난다고 한다.


때로 일이 제 멋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냉침중’이라고 생각해 볼까 싶다. 얼마나 더 맛있는 향이 나려고, 얼마나 더 깊은 힘을 가지려고 이리도 오래 걸리나 하고, 하루를 보내볼까 싶다. 어쩌면, 내 삶도 뜨겁게 내린 시간보다 오래도록 오도카니 냉침한 시간이 더 풍부한 향을 머금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시간만큼, 차가운 시간에 놓일 때 말이다.


어젯밤에는 쑥차를 냉침해 뒀다. 참고로, 냉침한 쑥차는 짱 맛있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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