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총량
어느 날은 도저히 글을 쓸만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자판과 몇 차례 씨름을 반복하고 결국 백지로 돌아가기 일쑤다.
혹자는 모든 사람에게, 하루 해야 할 말의 총량이 있다고 말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과의 인사 두 마디, 자주 들르는 동네가게 아저씨의 하소연 다섯 마디, 오랜만에 닿은 반가운 친구 연락에 스무 마디. 그러니 거듭 고민해도 말이 떠오르지 않는 날은 이미 말의 총량을 다 채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의 몫을 다 했다는 생각을 위안 삼아 자판을 치우다가도, 무슨 할 말이 남았는지 구태여 차를 한 잔 우려 와서 앉는다. 차가운 물에 올려둔 찻잎이 우러날 때까지 어떤 문장이라도 써보고자 갈색 소파에 등을 기댄다. 이렇게 괜히 고집을 부리는 날은 마음에 갈 길을 잃은 말들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경우가 많다.
머리에, 마음에, 또 몸 구석구석에 제 멋대로 흩어져있는 말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여 문장으로 엮는다. 엮인 것은 저마다 무게가 생기는 모양인지, 이 말은 여기에, 저 단어는 저곳에 처소를 삼는다. 어느새 소란한 생각과 함께 찻물이 진하게 내려앉는다.
가만히 앉아 글을 쓸 시간도 마땅치 않지만 나는 내가 만족스럽다. 살겠다며, 몸부림치는 나를 발견하노라면 기특하고 고맙다. 정돈된 마음에 용기를 얻는다. 정리가 그러하듯, 버려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되새긴다.
창문을 열면 라벤더 나무가 보인다. 보라색 꽃이 퍽 예뻐서 창 앞에 의자를 가져다 뒀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거기에 앉아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