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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집

해찰

by 글임

“저는 꼭 출발하기 전에 5분 정도는 그냥 보내요. 그러다 보면 놓고 온 물건들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트럭에 물건을 가득 싣고 일터로 출발하기 전, 나보다 한참 먼저 일을 시작한 그는 내게 말했다. 그는 때마다 꼭 그 습관을 지켰다. 시공을 위해 장비를 옮기는 일이 꽤 오래 걸린 탓에 출발시간이 지체될 때도 그랬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사무실로 올라간 그는 오른손에 빨간 손잡이가 달린 니퍼를 들고 돌아왔다.


꼭 그런 일이 있다. 니퍼처럼 작은 물건을 놓고 오는 일. 잊힌 것은 꼭 스스로 홀대받은 기억을 되갚는다. 두고 온 USB 때문에 강의를 급하게 준비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든지, 잃어버린 차 키 때문에 새벽에 영화관 주차장 앞을 서성인다든지, 놓고 온 니퍼 때문에 작업을 중지하고 두세 시간 퇴근이 늦어진다든지 말이다. 대게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이토록 작은 것들이다.


한 번은 친구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려고 영화관 약속을 잡았던 기억이 있다. 심야 영화를 다 보고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워 영화관 앞 공원 벤치에 걸음을 붙잡아 두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눴으면 하는 바람에 으레 실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느지막한 봄바람에 찬 기운이 돌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제 춥네!”라는 말을 내놓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당연히 있어야 할 차 열쇠가 없었다. I 6번 좌석,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가지고 있었으니 차 열쇠를 잃어버린 곳은 내가 앉았던 그 자리가 분명했다. 늦은 새벽이니 영화관 문은 당연히 닫혀있고, 다음날은 출근해야 하니 차는 꼭 가지고 가야 하는데 가져갈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큰일이다.’ 한참을 어두운 주차장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불 꺼진 영화관에 외로이 떨어진 차 열쇠가 내게 남긴 복수였다.


나가기 전에 가만히 앉아 둘러보았더라면 차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리를 살폈을 수도 있고, 의자 밑에서 떨어진 차 열쇠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트럭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기대 서 있다가 니퍼를 떠올렸던 그처럼


‘해찰한다.’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물건을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려 해친다든지,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는 걸 말한다.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닐지 몰라도, 더러 유용한 말이다. 어느 상담학 교수는 상담사에게도 이러한 ‘해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담받는 내담자를 해석하고, 판단하기 위해 애 쓰려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둘러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야 “아!” 깨달을 수 있다.


‘쓸데없는 다른 짓‘을 하는 태도는 때로 우리의 삶에도 필요하다. 마음껏 달려온 허다한 목표로부터 발을 떼고 두런두런, 둘러봐야만 한다. 놓고 온 차 열쇠는 없는지, 두고 온 니퍼는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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