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주의자의 사생활
날이 궂어서, 운수가 사나워서, 바람이 불어서, 햇살이 눈부셔서 나는 구백 년마다 한 번씩 사람다워지려고 미장원에 간다. 헤어샵에는 언냐들이 있고, 미용실에는 실땅님이 있고, 미장원에는 원장님이 있다. 나는 나름 유명한 무명작가라서 원장님 정도의 레벨에서 원숙한 관리를 해줘야 한다. 더구나 내 헤어는 아무나 만져도 될 만큼 만만한 스똬일이 아니다. 그 무수한 언냐들이나 실땅님들은 알 수 없는 어떤 깊이가 내 머리에 있는 것이다.
내가 애용하는 <초원 미장원>은 정말 초원에 있다. 초원에 있는 것처럼 촌스럽다는 뜻이다. 보통 미용실에는 외국잡지가 가지런히 꽂혀 있지만, 초원 미장원에는 국산 잡지들이 소파 아무 데나 나뒹군다. 우리 원장님은 나를 무척 아끼신다. 도깨비신부 은탁이 이모를 닮아서 스스럼 없고 괄괄하다. 내가 나온 잡지책, 우먼센스와 퀸을 항상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손님들이 잡지를 펼칠라 치면 몇 페이지에 나온 그이가 내가 매만져주는 붉은 작가라고 귀가 따갑도록 자랑을 늘어놓는다는 후문이다.
"원장님, 나를 너무 심하게 팔아먹는 거 아니예요?"
"림작가,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야. 인기 물오를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겠어. 내가 지금껏 자기한테 공들인 게 얼만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엥? 원장님이 나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다고 공치사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어디 미스코리아 대회라도 나갔다 온 줄 알겠네."
"헐! 오늘날 림작가의 성공이 있기까지 내가 스따일리시하게 코디해 주느라 얼마나 개고생이 심했는데 그걸 몰라주다니 서운해도 보통 서운한 게 아니네. 콱, 혀 깨물고 하직해버리고 싶네."
"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지금껏 순전히 공짜로 머리한 줄 알겠네요. 내가 원장님 공덕을 왜 모르겠어요. 나중에 방송 타면 모든 영광을 초원 미장원 원장님께 돌립니다~ 하고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셨죠?"
"정말? 정말이지? 흐흐흐 아이고 좋아라. 그러면 그렇지 내가 사람 볼 줄 안다니까."
"근데요, 원장님이 나를 파는 건 좋은데 미장원 사업에 도움이 되긴 해요?"
"도움이 되냐고? 크크크. 그게 명예지 뭔 도움이 되겠어? 자식 키우는 엄마의 마음 같은 거지. 대리만족 말야. 그토록 붉은 엄마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으음, 그러시구나.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오늘은 그냥 머리만 감겨주세요."
"왜에? 구백 년 만에 나타나서는 웨이브 안 하구?"
"아들의 마음이라서 그냥 따땃한 엄마 손길만 닿아도 그토록 만족할 거 같아요."
"뭐시라? 이런, 이런..."
날이 너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원장님과 함께한 모든 날이 내겐 행복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 나는 도깨비가 아니라 변덕스런 인간이라서 머릿결이 찰랑찰랑 윤기나는 언냐들이 현란하게 가위질 해대는 <현란 헤어>로 옮겨볼까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