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관계의 균형에 서툰 당신에게
“버티는 인생만 살다 보면, 자신이 뭐가 하고 싶어 이곳에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아무튼 살아보자고,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때론 이렇게 사는 것은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에 대하여』중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그녀에 대하여』 앞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문장을 본 순간 나는 막막해졌다. 어디론가 훌훌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수집해놓고 자신의 떠남에 대한 정당한 근거로 삼기에 적절해 보였다. 밑줄을 그어댔다. 이 문단에 동그라미를 서너 차례 세차게 치다가 연필심이 툭 하고 부러졌다. 마냥 동의할 수 없는 불편한 심사가 뾰족하게 돋았던 것이다.
즐기면서 살지 왜 바보같이 참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모욕이다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 어쩔 수 없이 내 삶을 갉아먹듯이 나를 위한 나의 희생도 행복을 갉아먹는다. 행복을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 물론 지금 버티는 건 나중에 버티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븐의 시간을 인내하는 건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인 것처럼. 버티는 사람은 목적이 분명하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토록 버틸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버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버틴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즐기면서 살지 왜 바보같이 참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모욕이다. 저 문장의 ‘버티는 인생’은 지나치게 잔혹하고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인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가운데 ‘버텨야 할 어느 때’를 담담하게 버티는 것일 테니까.
무언가에 '대항하는' 삶보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
삶의 무게에 눌린 사람들은 삶을 투쟁이라고 말한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삶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들도 안다. 무언가에 ‘대항하는’ 삶보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래도 그들은 오늘도 버티고 산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일지라도 기꺼이.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얼마간 버텨낸 시절의 고통에 빚지고 있다. 그것이 행복의 관계성이다.
그러므로 버티고 있는 사람을 보거든 어리석다고 비웃지 말자. 가여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자. 불행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도 말자.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하고 자신의 여행을 떠나자. 떠나가서 지금을 버티는 자들의 몫까지 삶을 감각하고 오자.
부디 어떤 경우에라도
나의 행복을 유예하거나 구걸하지 말자.
버티는 순간에도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간다 <관계의 물리학>바로가기 http://bit.ly/2FDoa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