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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Jul 08. 2018

서른에 잔치는 없었다

삶과 관계의 균형에 서툰 당신에게

내가 맞이한 서른은 혼란스러웠다.


얕아 보여서 발을 내밀었는데 막상 담그고 보니 강바닥이 디뎌지지 않아 허우적거리게 된 느낌. 당당하고 거침없이 건너야 하는데 스무 살 때보다 더 세상을 알아서 자꾸 움츠러들고 서성거리게 되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징검다리가 놓인 곳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자신 없는 모습을 내보이기 싫었다. 서른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숨을 데가 없었다. ‘서러우니까 서른!’이라고 읊조리며 눈물의 잔을 삼키는 날이 많았다. 사람과의 관계는 그중 힘들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더 모르게 되었다. 불투명 유리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사물도 현상도 나 자신마저도 뿌옇게 보였다. 살아낸 만큼 살아질 것 같았는데 자꾸만 어긋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했다. 환절기 같아서 간간이 몸살 기운이 퍼졌다. 봄옷을 입고 있기에도 겨울옷을 꺼내 입기에도 난감했다. 내가 그렸던 서른의 모습과 달라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설고 불길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조금은 행복해질 권리가 내게도 있다고 믿었다. 열심히 산 만큼의 수입을 갖고 싶었다. 보통의 일상을 꿈꿨다. 이 정도면 욕심부리지 않는 거라고, 이 정도면 들어줄 거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나아갈수록 물러나는 것 같았다. 문워크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는데 몸은 자꾸만 뒤로 가는 느낌.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행복이란 놈이 유독 나만 따돌리는 것 같아 샤워기를 오래 틀어둔 적도 있었다. 생활이 원한다면 시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자책할 것도, 비난당할 것도 아닌 시간, 서른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른은 피아 식별이 안 되는 늑대의 시간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기에도 실의에 빠지기에도 후회를 하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모든 책임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할부와 대출로 얻은 것이라서 확실한 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 사회든 직장이든 확실한 내 편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행복이 아니라 생활을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동자였다. 그것이 나의 서른이었다. 그러므로 서른은 결코 자책할 것도 누구로부터 비난당할 것도 못 되었다. 그런데도 서른을 떠올리면 막막하고 다시 서럽다.


스무 살 때처럼 반항하고 아우성쳤어도 좋았고
삶이 원래 그런 거라고 일찍 달관한 사람처럼 굴지 않아도 좋았을 것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서른이었으니 서툰 대로 실수해도 좋았을 것이고, 부딪히고 터져도 좋았을 것이고, 타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홀연히 떠나온 것처럼 그렇게 기약 없이 살아도 좋았을 것이다. 한 시인은 서른을 두고 잔치는 끝났다고 했지만, 애당초 서른에 잔치는 없었다.


어떻게 살아도 나중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게 인생이다. 다 고만고만하고, 결국에는 ‘살아냈음’에 수렴된다. 날개를 파득거리며 기우뚱기우뚱 창공을 향해 조금씩 상승하는 수밖에 다른 이륙 방법은 없다.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단번에 날아오르는 서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관계의 물리학 바로가기> http://bit.ly/2FDo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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