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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우체국에서 쓴다

by 림태주




2002년 늦가을에 치료약이 없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쳤다. 전염병은 다음 해 여름까지 세계 32개국 8천여 명의 인간을 감염시켰고, 이중 77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중국과 홍콩에서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라 불린 이 유행병은 한국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못했다.

사스와의 힘겨운 전쟁이 끝나자 대통령은 일선에서 수고한 민관 의료, 보건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표창하려고 했다. 그런데 관계자들이 국립보건원에서 수여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대통령께서 이리로 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보건원으로 가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왜 저들은 청와대에서 성대하게 치러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내게 그리로 와달라고 했을까?

대통령은 관계자들로부터 사스 퇴치 현황과 향후 대책을 보고 받고 표창수여식을 마친 후, 예정된 연설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보좌진이 작성해 준 연설문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상기된 어조로 연설을 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공무원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뿌듯한지, 혼연일체가 되어 위험한 전염병과 싸워준 당신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국민과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대통령 특유의 어눌한 듯 명쾌한 어조로 얘기했다. 대통령으로서 앞으로 무엇을 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정성 있는 약속을 했다.

대통령은 생각했다. 경제니 정치니 국제사회니 하는 뉴스에 나오는 큰 의제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실은 국민 개개인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소소한 일이 가장 근본적인 일이고 정부가 할 가장 큰 일이라고. 평상시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국립보건원처럼 존재감 없어도 보이지 않는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공무원들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그들이 나를 여기로 부른 거라고. 대통령은 그들의 애쓰는 마음을 그렇게 헤아렸다.

그해 세계보건기구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가, 방역 성공국가라고 인정받은 대한민국은 다음 해 1월, 대통령의 약속대로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같은 조직을 보건복지부 산하에 만들었다. ‘신속하고 정확한 질병정보의 전달과 과학적 근거가 있는 신뢰성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질병의 발생과 감염 위험의 감소를 목표’로 하는 질병관리본부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대통령은 국립보건연구원, 일선 검역요원들, 군 인력 등이 24시간 사스를 방어하는 동안, 상황실을 설치하고 하루에 두 차례씩 보고를 받고 대처해나간 재난대응컨트롤타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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