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 살면 자연스럽게 얼굴이 탄다. 아무리 선크림을 잘 발라도 수영이나 산책을 하게 되면 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아직도 하얗다. 그래서 둘째를 보는 사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정말 하얗다~"다. 반면에 나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수영도 그렇게 자주 하지 않고 따로 야외활동을 할 시간이 없는데 점점 까맣게 변하고 있다. 그건 바로 둘째와 매일같이 하는 산책 때문이다.
오후 3시. 한창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이면 둘째의 하원 버스가 온다. 가끔씩 그냥 집으로 갈까? 하고 넌지시 물어볼 때도 있지만 비가 쏟아지는 거 아니면 무조건 산책이다. 그럼 나는 유모차를 밀고 우리가 늘 가는 몰을 향해 간다. 출발하자마자 뜨거운 햇볕이 느껴지고 둘째는 "눈부셔!" 한 마디와 함께 유모차 차단막을 내린다.
그럼 나는 "너만 덥냐!"는 소심한 한마디를 내뱉고 나서 군말 없이 유모차를 민다. 둘째는 햇볕이 강할 땐 차단막을 내렸다가 구름에 해가 가려져서 그늘이라도 생기면 바로 세상 구경하기 바쁘다. 아직 27개월 밖에 안된 아이지만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이렇게 명확한 게 가끔 참 신기하다.
꽃과 나무를 보면서 천천히 앞으로 간다. 가끔씩은 도마뱀도 보고 원숭이에 놀라기도 하며 고양이가 자는 걸 구경할 때도 있다. 어제는 오랜만에 도마뱀을 봤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흔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잘 못 봤다. 벽에 붙어 있는 작은 도마뱀을 발견 한 날은 무조건 아이와 서서 한참을 보곤 한다. 도마뱀의 작은 움직임에도 즐거워하며 깔깔 웃고 나면 아이와 특별한 경험을 한 것만 같이 기분이 좋다. 세상에 아이와 나만 있는 기분, 세상이 잠깐 멈춘 듯한 순간이다.
햇볕이 너무 뜨겁다며 구시렁거리긴 하지만 사실 나도 산책이 정말 즐겁다. 초록빛의 나무를 보는 것도 좋고 중간중간 만나는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도 좋다. 그래서 점점 까맣게 변하는 것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냥 까맣게 타는 게 아니라 기미와 주근깨가 심해진다. 원래도 피부가 깨끗한 편은 아니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많이 심해졌다. 세심함과는 거리가 먼 남편이 어느 날 "너 얼굴에 뭐 묻었어"라고 말했을 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선크림도 더 바르고 챙이 넓은 모자도 써봤는데 다 귀찮았다. 특히 모자는 산책을 다녀와서 하원하는 첫째를 데리러 가야 하는 나에게 많이 불편했다. 한껏 눌린 머리로 친구 집에라도 놀러 가는 날엔 어찌나 민망하던지.. 몇 번 쓰고 말았다. 요즘은 그냥 우산을 쓴다. "햇볕이 너무 뜨꺼워!" 하면서 우선을 활짝 피면 둘째는 "나도 나도"라고 말하며 유모차 차단막 아래로 쏙 들어간다. 그럼 모습을 볼 때면 조금 얄밉고 귀엽고 그렇다. 물론 귀여운 게 훨씬 더 크긴 크다.
우산 쓰기의 최대 단점은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나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접어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보다는 편하다. 첫째가 8월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하원 시간이 똑같아서 두 아이와 산책 말고 다른 걸 하며 놀 거 같다. 그때는 둘째도 좀 타려나.
얼마 전에 남편과 파친코를 봤다. 그때 주인공 얼굴에 있는 주근깨를 보면서 남편이 "너랑 닮았다"라고 말했다. 놀리려고 한 말인 건 알고 있고 딱 주근깨만 닮았다는 소리인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예쁘게 보인다면.. 스트레스받지 말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들고 있다. 남편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다니 나도 참 귀가 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