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위단비

노량진에서 전철을 갈아타며, 멀리서 양주행 지하철을 봤다.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는 2주에 한 번씩 아침 6시가 되면 저 지하철에 몸을 싣곤 했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4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고 준비하고 집을 나서면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이 어둡다면 겨울이구나, 밝다면 여름이구나, 하고.


그 시절의 계절은 어째선지 늘 봄 같다. 부대 안에 꽃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그냥 햇빛의 느낌이 그렇다. 그때의 우리도 봄 같았다. 이제 막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서던 우리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의 얼굴은 앳되고도 앳된 얼굴이다.


앳된 그는 그곳에서 수십 권의 노트를 가득 채워왔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의 노트 일부는 내 것이 됐다. 아, 소중하다. 나는 그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 노트들에는 그의 세계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 채 자라지 못한 그였지만 그의 세계는 누구보다 거대한 우주와 같았다. 넓디넓은 그의 세계 안에서 ‘나’라는 한 조각을 찾아내는 것도, 참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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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 너의 일면만을, 나의 마음 한 켠만 써서 사랑한다는 거니까. 그것보다는, 너의 우주가 되어, 영원히 응원할래. 넌 똑똑하니 네가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알아. 탓하는 것보다, 유도시키고 강요하는 것보다, 네가 느끼고 결정한 너를 응원함으로써, 슬프고 기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모습을 언제나 지켜볼게. 너도 나의 우주야, 단비야.



우주를 유영하는 우리.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유영했다. 그리고 세상을 유영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듯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그와 나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던 우리. 나의 우주, 너의 우주. 우리의 우주.




잡히는 건 없다. 보이는 것도 없다. 기억하는 것만 있을 것이다. 그는 나를 지켜볼 것이다. 나는 그를 지켜볼 수 없다. 우리의 단절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아니, 나의 단절은 여기서 시작됐다. 여전히 나를 느끼겠지. 나는 나를 느끼는 너를 믿는다. 느껴지지 않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나를 느끼는 너를 믿는 것은, 나를 느끼는 너를 느끼고 있는 것일 테다. 꼬이고 꼬여버린 너와 나의 거리. 간접적인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꼬여버린 실타래의 한 끝자락을 잡고 매달린다.


매달린 나의 옷은 새파랗게 물들어있다. 파란 잉크가 내 치마 밑단으로 뚝뚝 떨어진다. 다리가 좌로 우로, 흔들린다. 매달린 것은 나의 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여기, 이곳에 매달려있다.


허공에 걸음걸이를 걸어본다. 나는 걸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내가 걷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나를 믿고 응원하는 그. 힘내, 걸을 수 있어, 걸어 나가고 있잖아, 너를 응원해, 사랑해, 여기서는 발을 이렇게 뻗어봐, 그렇지 잘하고 있어, 어느 쪽으로 향할 거니, 으응 그래 그쪽도 좋아 보여, 슬프구나, 기쁘구나, 너의 모든 모습을 사랑해, 사랑한다.


실을 끊어내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는다. 실을 타고 숨이 들어온다. 들어온 숨은 내 혈관을 파랗게 물들일 것이다. 물든 혈관은 꼬이고 또 꼬여있다. 꼬여진 혈관을 누군가가 헤짚는다. 헤짚어진 혈관들은 터질 듯 터지지 않는다. 심장이 갑갑하다. 나를 향한 너의 기대가 내 치마 밑단으로 뚝뚝 떨어진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낮에는 찌는 듯이 더웠는데,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거든요. 월요일부터는 다시 비가 온대요. 이 더위가 비에 씻기기를 바라요.


당신이 없는 더위가 익숙해지기 시작했어요. 기억이 나요, 당신과의 여름이. 우리는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지냈지요. 더위를 참을 수 없어서 하루에도 서너 번 샤워했어요. 끈적이는 더위에 잠을 깬 적도 있지요. 그 시절의 제가 썼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 순간 선풍기 소리와 장맛비 소리는 하와이의 파도가 됐어. 담뱃진에 절은 벽지의 얼룩은 해변이 되었고 오래된 냉장고 소리는 파도 소리가 되었지. 우리는 땀인지 무기력인지 하여튼 정체 모를 것들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옷들을 벗어버리고 꽃무늬 롱 원피스와 수영복 차림이 되었어. 너한테 말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며 그 옷마저 한 장씩 벗어버리고 싶었어.’



선풍기와 장맛비와 냉장고가 만드는 파도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헤엄을 쳤어요. 끈적이는 여름을 집어던진 채로. 그렇게 십여 년 가까이 선풍기에 의지하다가 처음으로 에어컨을 산 해는 얼마나 좋았던지요. 할부로 가전제품을 사니 이제 어른이 된 것 같다며 뿌듯해했죠.


우리는 같이 자랐어요. 열아홉의 끝자락에 서로를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요. 완전히 자라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우리는 만났어요. 1년만 늦었다면, 혹은 1년만 빨랐다면 우리는 이렇게 잘 자라지도 잘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고 우리는 자주 얘기했어요. 만나기 전의 우리를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랬어요. 그 시절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도 있죠.



‘차혁이는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새까만 저주를 퍼붓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 또한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 또한 새빨간 저주를 나 자신에게 마구 퍼부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엄마를 실망시킨 나 자신에 대한 저주. 희라가 아닌 전혀 다른, 빨갛게 얼룩진 나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원망과 경멸.’



새까맣고 새빨갛게 스스로 저주하던 우리는 만나서 서로를 안아줬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줄이었어요. 그 줄은 튼튼한 밧줄은 아니었죠. 실처럼 가느다란 그 줄을 움켜쥐고서는 버둥거리듯 살아왔어요.


그런 실을 먼저 끊어버린 것은 소설과는 반대로 나였어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다며, 당신을 그 집에 남겨두고 나왔어요. 그런 저와 친구 사이로 남아줘서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지요.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당신이라는 친구를 가진 나는 두려울 게 없었어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똑같대요. 누군가는 행운을 먼저 당겨서 쓰고, 누군가는 불운을 먼저 당겨서 쓴다고 하죠. 당신을 만난 건 제게는 너무 큰 행복이었나 봐요. 서른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당신은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만난 지 13년 차, 친구가 된 지는 2년 차의 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당신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너무 뻔한 말밖에 나오지 않아요. 새로운 단어와 새로운 말들로 당신을, 우리를 표현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 글들을 시작했어요. 쉽지는 않지만, 다시 한번 해 볼게요.




끊어진 실의 그림자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떼 내려해도 떼어지지 않는 그림자. 그는 그렇게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내가 살았으면 하고 바라나 보다. 그의 새빨간 욕망이 실 한 가닥을 타고 내 심장으로 스며든다.


너의 욕망을 새빨갛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욕망은 파란 것, 그만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마음인걸. 나의 무기력은 내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는 것에서 오는 것. 삶과 죽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다시 한번 너를 보며 깨달은 것. 너는 스스로 실을 끊어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네가 스스로 죽은 줄 알았지만. 목숨을 쉽게도 생각하는 사람들. 너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쉽게도 죽어버린 너.


나도 너처럼 떠나고 싶어서 일부러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도 절대로 병원도 안 가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야, 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남은 생은 너무나 길게 남아있다. 아직도 똘똘 엉켜있는 채로 채 풀리지 않은 나의 실타래.


남은 30m의 실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열아홉의 약속을 기억해? 서른다섯에 죽고 싶다던 내게 너는 그때 날 죽여준다고 약속했잖아. 나중에는 내게 제일 많이 하던 말이 ‘오래 살아.’였지만 말이야. 나는 네 말대로 오래 살 것 같아. 너 없이 살 30년의 세월이 너무 무겁다, 광희야.


그렇지만 나는 살아나갈 것이다. 거구였던 너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남은 생을 온전히 너에게 바친다. 나의 글들도 온전히 너에게 바칠 거다. 웃으면서 널 만날 수 있게, 라는 뻔한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내가 언젠가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림자는 떼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실의 그림자도 나와 너에게서 떼어질 수 없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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